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ivhon Mar 05. 2023

おげんきですか。

이와이 슌지<러브레터>

 사람의 취향은 건물과 비슷하다. 만일 영화, 음악, 책과 같은 것들을 접하며 그것들로 기둥을 세워나가는 것이 취향을 건설하는 일이라면, 나는 어느 정도 크기의 건물주(?)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하곤 했다. 나와 비슷한 크기와 비슷한 모양의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만약 내가 가진 취향의 중심부에 커다란 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다면 그건 바로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일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본 이후, 이 영화의 색감, 음악, 배우, 장소들을 모두 좋아하게 되었고, ‘러브레터’라는 거대한 기둥 주위로 여러 기둥들이 새롭게 세워지기도 하였다.     


 ‘러브레터’라는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히로코는 죽은 약혼자 이츠키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는 이츠키와 동명이인이었던 (히로코와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여자 이츠키에게 ‘불시착’하고 만다. 동명이인, 1인 2역이라는 내용으로 얽혀있는 이야기를 이와이 슌지 감독은 조용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차근히 풀어낸다.     

 이 영화에 대해서, ‘남자 이츠키의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이라거나, ‘히로코에게서 이츠키(女)로 이월되는 추억과 사랑’ 등의 코드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영화는 ‘애도’에 대한 영화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그건 히로코가 하얀 눈밭에서 ‘오겐키데스까(잘 지내세요)’라는 대사를 외치는 장면일 것이다. 마치 죽음을 의미하는 듯이 검고 조용하게 서 있는 산 앞에서 연약해 보이는 뒷모습의 히로코는 같은 대사를 반복해서 외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장면 전까지 히로코는 이츠키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을 애써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츠키가 죽은 설산 앞에서 외면해왔던 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리움 섞인 질문으로 시작된 목소리가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절규와 비슷한 음성으로 고조되는 시퀀스에서 애써 눌러왔던 히로코의 감정은 결국 터져 나온다. 히로코는 이 장면에서 지금껏 마주 서지 못했던 그의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를 떠나보낸다.     


 하지만 이 영화를 ‘애도’의 키워드로 읽어낼 때 더 유의미하게 보이는 장면은 다른 국면에 있다. 히로코가 설산을 마주할 것을 두려워하는 동안 여자 이츠키는 감기로 인해 쓰러진다. 그리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그녀의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그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대하는 두 가지 자세를 보여준다.

 이츠키의 어머니는 과거 남편의 죽음이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뛰어간 탓이라고 생각하며 병원까지 뛰어갔던 시간을 한 시간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스크린 속 그녀의 표정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반면, 그를 직접 업고 뛰어갔던 이츠키의 할아버지는 '정확히 38분 걸렸다‘라고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며 지금 이츠키를 업고 뛰어가면 구급차가 오기 전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아들의 죽음을 초래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다시 마주하게 된 선택의 시간에서 그에게 상상하기 힘든 중압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로부터 주어진 선택을 해내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나에게는 설산 앞에서 ’나는 잘 지낸다‘라고 외치는 히로코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삶은 죽음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이별을 우리 앞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발목을 잡는 것은 과거에 겪었던 이별의 기억들이다. 대부분의 이별은 실패로 기억되기에 우리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눈을 피한 채 돌아서 나아가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실패를 돌아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통과해서 나아갈 것을 권한다. 현실은 영화와 달리 따뜻한 해피엔딩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지나간 이별을 제대로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은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새로운 이별의 순간에 더 잘 실패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사춘기의 종결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