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3-09.13, 아트선재센터
2020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이미래의 개인전 <Carriers>에 대한 회고이며, 후기입니다.
이 전시를 보기 2년 전, 나는 어느 구기동의 작은 대안공간에서 이미래의 전시를 보았다. 기억이 분명하진 않지만, 그녀는 그 당시의 작업 중 하나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를 먹어 줄래요?"
4층에 들어서며 나는 높다란 가벽의 뒷면을 마주한다. 그것은 한없이 우리를 등지고 있다. 경계는 등지고 있을 때 가장 분명하게 인식되는 법이다. 그것은 작품의 공간과 그것에 미처 닿지 않는 외부의 공간을 따라 그어진 금이다. 그러나 인식 가능한 경계는 어떤 전복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경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단절을 알고 있다는 것이므로. 그리고 바타유가 말하듯, 금기에 의해서 금지된 행위는 더욱 분명하게 인식되므로 나는 이 단절을 더욱 분명하게 의식한다. 나는 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인다. 금을 넘어서고 경계를 침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 열망을 일으키는 것은 경계가 가진 전복적 가능성으로부터 촉발되기도 하지만, 지금 들리는 이 소리, 소리가 날 미치게 한다. 그 소리는 내부와 외부 사이를 가로막은 경계 안에서 바깥으로 넘쳐흐른다. 그것은 그녀의 키네틱 조각으로부터 우연적으로 생산되는 부산물이다.
그 모든 소리의 원천은 작품을 이루는 것들 중 가장 연약한 물질들, 유체로부터 시작된다. 관과 호스를 타고 뿜어지기도, 추락하기도, 빨아들여지기도 하는 동안 점액질의 물질 속으로 필연적으로 유입되는 공기이다. 공기는 <캐리어즈>라 이름 붙은 어떤 생물의 내장을 닮은 호스 속을 흐르는 점액 물질 속으로 침입하여 작가가 의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잡음을 만든다. 끈끈한 점액질들의 소리 없는 흐름을 거칠게 단절시키며 자신의 극적인 분출을 알리듯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저변에 깔려있는 모터의 회전음. 그것은 키네틱 조각을 반복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한 번 떨어진 유체들을 다시금 내장 안으로 흐르게 만든다. 그것은 가장 안정된 상태의 점액질들을 다시금 가장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어 추락을 감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모터는 작품의 움직임을 일회적인 소요가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움직임으로 만드는데, 그 방식은 안주하는 것들을 불안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리고 모든 반복을 매번 새롭게 만드는 것, 모터는 동일한 작업을 반복할 뿐이지만 내장 속에서 움직이는 유체들이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유체이며, 점액질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공기이다. 무정형의 물질로서 늘 어느 정도의 우연성에 기반하게 되는 이 움직이는 조각은 공기가 행하는 경계의 침범에 의해 (말하자면) 살아있다. <캐리어즈>는 위상학적으로 구멍이며, 그렇기에 그것의 내부로 전시장의 공기들은 빨려들어가고, 따라서 전시장과 작품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관람객으로서의 나 또한 무사하지 못하다. 캐리어즈는 나마저도 빨아들이고 있었던 셈이다. 구멍의 미학이란 그런 것이다.
유체역학의 개념 중에 점성소실vicious dissipa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유체 내에서 점성에 의해 에너지가 소실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소실dissipation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환되어 더이상은 일에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모터의 회전음은 모터에게 전달되는 에너지의 일부가 비가역적으로 소산dissipation되는 것이며, 유체가 강제적 노동 속에서 만들어내는 불규칙한 소음 또한 에너지의 소산이다. 내가 가벽의 바깥에 있을 때부터 경계 너머로 전달된 소리들은 모두 <캐리어즈>를 구동하는 에너지들의 소산이며, 그것은 돌아갈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환되는 대신 가벽의 경계를 넘었던 것이다.
바타유는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며 전율한다. 그곳엔 폭력과 죽음, 에로티즘을 발견한다. 그는 죽어가는 황소의 찢어진 배 아래로 드러나는 내장을 본다. 그것은 폭력의 상태이지만, 한편으론 다르게 인식된다. '찢김'으로서의 열어젖힘.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결정적인 행위는 발가벗기이다. 나체는 폐쇄된 상태, 다시 말해서 존재의 불연속적 상태와는 대립적이다. 그것은 자신에의 웅크림 너머로, 존재의 가능한 연속성을 찾아나서는 교통의 상태이다." 그에게 몸이라는 물리적 실체는 경계이며, 그로인해 인간은 불연속성을 갖고 세계와 단절된다. 그에게 성행위의 기본 원리가 신체가 갖는 근본적인 폐쇄적 구조를 파괴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에게 내장은 더욱 더 열렬하고 격렬한 열어젖힘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래의 <캐리어즈>가 우리에게 '등진 가벽'으로서 제시했던 첫인상은 단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일 뿐이지만, 이미래가 자신의 작업 자체를 내장으로 인식하는 순간 뒷면으로서의 경계는 (그 내장을 소유한 존재의) 신체가 되며, 그 순간에 변화하는 것은 영역의 구분으로서 경계를 가르던 가벽이 사실은 신체의 일부라는 것, 그렇기에 그것은 사실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 기관들중 가장 표면에 존재하는 것들, 눈, 코, 입, 귀, 피부가 외부를 향하듯, <캐리어즈>의 피부로서 가벽 또한 관람객들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키네틱 조각은 가벽으로 둘러쳐진 폐쇄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내밀한 기관의 작동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열어젖혀지기 위한 조각임을 알게 된다.
무언가를 옮기고 담기 위한 용기容器라는 의미의 <캐리어즈>는 단순히 어떤 사물만을 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이나 정신을, 사업이나 말을 옮길 수 있다. 따라서 캐리어즈라는 단어는 적확한 정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 속에 담아지는 것, 옮겨지는 것에 의해 늘 다른 방식으로 불릴 뿐이다. 그것은 때에 따라 가방이기도, 혈관이기도, 용기이기도, 교통수단이기도, 영매이기도. 그렇다면 그녀의 작업은 무엇을 위한 용기인가? 다시 말해, 서슴없이 내장이라 부를 만한 섬뜩한 질감과 소리로 가득한 작업을 통해 그녀가 옮기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절대로 가질 수 없는데도 너무나 욕망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업과 함께 제시되는 '보어필레아vorephillea', 잡아먹거나 잡아먹힘으로서 하나가 되려는 페티쉬적 관점에서 그녀의 행위를 바라본다면, 그녀가 대상에게 가하는 폭력인 '신체와 내장을 가르는 행위'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자 대상과 하나가 됨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내장에 대한 그녀의 이러한 집착은 생명, 혹은 존재의 내적 원리에 다가가려는 그녀의 열망이다. 그러한 목적 없다면 그녀의 작업은 단지 순수한 폭력과 잔인성의 재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일종의 처연함이다. 그녀는 대상의 배를 갈라서라도 찾아내고 싶은 존재의 신비 대신 꿀렁거리는 내장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캐리어즈>라는 작품의 제목에서 껍데기만 남아버린 것을 알아버린 체념의 감정을 느낀다. 내장을 아무리 갈라내고 물리적 거리를 좁히더라도 본질에는 다가갈 수 없다는 근본적인 불가능에 대한 깨달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불가해의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바타유가 '작은 죽음'을 발견한 것처럼, 그 속에서 자신만의 에로티즘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연속적인 존재로서 타고난 운명을 극복하는 순간임을 깨닫는다.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행위로서의 깃듦. 대상과의 연속성을 획득하는 순간의 열락.
보어필레아적 동일시를 통해 작품과 하나가 된 이미래는 가벽이라는 피부를 통해, 나와 접촉한다. 그 피부를 넘어 전달되는 그녀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하나가 되는 작가와 작품의 운동 속에서 발생하는 소산된 에너지이다. 그녀는 비가역적인 방식으로 속삭인다. "나를 먹어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