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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May 08. 2023

<LOAD: 미래수렵채집사회> 후기

소피아 이완누 게딩 개인전, 탈영역우정국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린 전시 <LOAD: 미래수렵채집사회Future Hunter-Gatherer Society>전시의 후기입니다.



소피아 이완누 게딩은 말한다. "The project aims to reflect upon how each reconstruction itself is a translation. The more translation, the more the line between fiction and fact gets blurry.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재구성 자체가 하나의 번역과도 같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더 많이 번역될수록, 허구와 사실 사이의 경계는 희미해진다.(Broken Telephone, 위스퍼 게임)" 대신 사실인지 허구인지는"이야기"에 의해 결정된다. "이야기의 무게에 대해"라는 전시 리플렛의 소제목은 그 무게가 단순히 진실의 함유 정도에 따른 무게가 아니라 책임으로 환원될 수 있는, 책임으로 환원되어야만 하는 무게다. 전시의 전경은 어두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프로젝션에 의해 가물게 빛나는 어둠의 인상이다. 그래서인지 뒤에서 핀 조명에 의해 환한 빛을 받는 3D 프린팅 등신 비율의 두상이 원시인류의 외관을 가진 탓인가, 그녀의 작업은 소개한 대로 자못 '고고학적'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고학적 작업을 한다기 보다 스스로 "고고학적 사유, 추리(archeological reasoning)"을 통한 작업을 한다고 밝히는데, 이것은 고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결코 알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 그렇기에 늘 이야기의 차원에 머물 수 밖에 없지만 사실로 간주되는 이야기를 생산하는 체계라는 점에서 고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실제의 고고학처럼 사실을 생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녀의 거리두기가 이루어진다. 그녀는 단지 고고학적 방법론을 통해, 허구fiction를 사실fact의 형식으로 생산하려 시도하는듯 보인다.


[위스퍼 게임]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전 작업(A Piano is too heavy to carry)에 등장한 캐릭터(그 캐릭터는 어느 문화인류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던 신석기 시대의 원시인류 모형을 재구성해 3D 오브젝트로 만들어 낸 것이다)를 사용한다. 그녀는 이 작품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골격 재구성과 안면 재건을 의뢰하는데, 그 의뢰의 과정 속에서 그녀는 많은 부분을 직접적으로 설정해야만 한다. 안면 재건팀인 Ancestral Whispers는 안면 재건 과정에서의 피부의 색소 침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1) 특정한 샘플의 DNA가 분석되었다고 할 때는 학계에 발표된 자료를 따르거나 직접 검사를 시행할 수 있고, 2) DNA가 전혀 분석되지 않는 경우엔 직접적으로 설정해 유전자 그룹의 평균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실로 간주되는 결과물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건 DNA라는 물질이거나, (마치 캐릭터의) 설정이다. 이후의 과정은 전과 비슷하게 이미 학계에 발표된 최신의 자료를 따라 얼굴 윤곽을 재생시키는 것이고, 마지막엔 사진처럼 실제적인photo realistic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서 GAN 모델과 포토샵을 이용한다. 시각적으로 구현되기 위한 데이터는 모두 완성되었다. 그러나 재구성의 최종 단계는 아직 남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과물에 이렇게 덧붙인다.

"The resulting image of the Neolithic woman serves as a reminder of the resilience of our ancestors and the challenges they faced in a world vastly different from our own. Looking at her wise but stern expression, we can only imagine the stories that she could tell us if she were here with us today."
신석기 여성의 결과 이미지는 우리 조상의 근성을 떠오르게 하며 우리가 마주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어려움들을 또한 떠오르게 합니다. 그녀의 현명하면서도 뚝심 있는 분위기를 보면서, 만일 그녀가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였다면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줬을 법한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역사학자와 이야기꾼의 말은 언제나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의 함정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살려진 신석기 시대 여성의 이미지는 그녀의 다른 작품, [프롭 피플]의 젤다의 재구성으로 이어지는 듯한데, 젤다에게 부여된 인공 유리 눈알은 캐릭터로서의 주체성에 대해 질문한다. 인공 안구를 얻은 젤다는 움직이기를 원하면서도 링크가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만 이내 젤다는 이렇게 깨닫는다. "만약 나를 찾지 못하면, 나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젤다에게 주어진 유리눈은, NPC(None Playerble Character)의 상태를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이야기꾼과 역사학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시선을 가진 주체로서 동등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담론적 역할을 외면한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젤다는 인식되지 않음으로써 (카메라 혹은 스크린의)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된다. 스토리텔링의 함정을 넘어서기 위해 그녀는 서사 바깥을 향한다. 여기서 어슐러 르 귄의 『픽션의 운반가방론』이 참조된다. 젤다가 서사 바깥으로의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역사가와 이야기꾼의 역할은 무효화된다. 거기서 우리는 이야기의 방식은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과 요구가 전시의 제목에 나오듯, 『미래수렵채집사회』이다.

소피아 이완누 게딩, <Prop People>, 탈영역우정국

여기서 1986년에 쓰여진 어슐러 르 귄의 『픽션의 운반가방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1986』을 소개하고자 한다. (리플렛에서는 『허구-운반가방론』이라 번역되지만, 『픽션의 운반가방론』이 더 적절한듯 보이는데, 이 글은 SF작가인 어슐러 르 귄이 픽션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이를 만드는 것은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3기니』의 도입부에서 제안된 버지니아 울프의 시도를 재조명한다.

she(Wolf) had thought of reinventing English according to a new plan, in  order to tell a different story. (...) heroism, defined "botulism." And  hero, in Woolf's dictionary, is "bottle." The hero as bottle, a  stringent reevaluation. I now propose the bottle as hero.
그녀(울프)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재발명하는 것을 고려했다. 영웅주의는 보툴리눔 식중독으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영웅은, 울프의 사전에서, "병"이었다. 엄중한 재평가. 그리고 나는 병을 영웅으로서 제안한다.

그녀 또한 울프가 재정의하는 필요성에 공감하며, 자신 또한 "영웅으로서의 병(용기)"를 제안한다. 그것에 대한 근거로서 하나의 짧은 구절을 인용하는데, 엘리자베스 피셔는 『Women's Creation』에서 최초의 문화적 생산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The first cultural device was probably a recipient(...). Many theorizers feel that the earliest cultural inventions must have been a container to hold gathered products and some kind of sling or net carrier.
최초의 문화적 장치는 아마 받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론가들은 최초의 문화적 발명품이 채집물들을 담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어떤 종류의 슬링이나 그물로 만든 가방이었어야만 한다는 걸 예감한다.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제반 조건으로서 언어의 재발명이다. 이야기를 새롭게 하기 위한.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영웅을 병으로, 하나의 용기로 간주하는 것. 수렵채집인들의 사회에서 용기carrier야말로 영웅이자, 가장 기본적인 발명품이다. 왜냐하면, 영웅들이 "에너지를 바깥으로 쏟아내기 전에, 에너지를 집으로 들고올 도구부터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운반가방에 대한 이야기가 축소되고 폭력과 영웅에 관한 서사로 가득한 것은 단지 최초의 시기에, 귀리를 주워담는 이야기보다 맘모스를 때려눕히는 이야기가 단지 더 흥미진진하게 들렸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도 "남자와 여자, 야생귀리 서식지와 아이들, 기술과 장인들, 생각과 노래가" 포함되어 있지만, 영웅의 이야기는 그들their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his의 이야기를 위해 희생될 뿐이다. 그녀는 신랄하게 말한다.

Go on, say I, wandering off towards the wild oats, with Oo Oo in the sling and little Oom carrying the basket. You just go on telling how the mammoth fell on Boob and how Cain fell on Abel and how the bomb fell on Nagasaki and how the burning jelly fell on the villagers and how the missiles will fall on the Evil Empire, and all the other steps in the Ascent of Man.
계속해봐, 내가 우우와 바구니를 들고 있는 움을 데리고 야생 오트나 찾아서 돌아니는 동안. 너는 그냥 맘모스가 붑 위로 어떻게 떨어졌는지 말하고, 아벨 위로 카인이 어떻게 떨어졌는지 말하고, 나가사키 위로 폭탄이 어떻게 떨어졌는지 말하고, 마을 주민들 위로 불타는 젤리가 어떻게 떨어졌는지 말하고(아마 드레스덴 폭격), 악의 제국 위로 어떻게 미사일들이 떨어질 건지 말하고, 그리고 나머지 다른 단계들에 대해서도 말해봐.

이것이야말로 맘모스의 눈에서 뇌까지 관통한 길고 딱딱한 화살로부터, 맘모스를 쑤신 길고 딱딱한 창으로부터, 맘모스를 마구 때린 길고 딱딱한 막대기로부터 시작된 (폭력으로 쓰여지고 그들에 의해 입법화된) 영웅의 이야기의 종착역이다. 진보와 선형적 사유, 이성이라는 "지배의 무기"는 단지 파국으로 치닫을 뿐이다. 무언가를 꿰뚫고 파괴함으로써 정복하는 도구로서 "길고 딱딱한 막대기"의 이야기는 이미 그 기원에서부터 종말론적 분위기를 풍긴다.

If, however, one avoids the linear, progressive, Time's-(killing)-arrow mode of the Techno-Heroic, and redifines technology and science as primarily cultural carrier back rather than weapon of domination, one pleasant side effect is that science fiction can be seen as a far less rigid, narrow field, not necessarily Promethean or apocalyptic at all, and in fact less a mythological genre than a realistic one.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기술-영웅의 선형적이고, 진보적이고, 화살처럼 (죽일듯이) 날아가는 화살의 방식을 피하고, 기술과 과학을 지배의 도구 대신 기본적인 문화적 용기로 재정의 할 때, SF를 덜 완고하고, 좁지 않고, 묵시록적이거나 프로메테우스적일 필요가 없고, 사실상 사실적인 소설보다 더 신화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착안된 SF는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정말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하고 느끼는지, 광대한 주머니 속에서 사람이 다른 모든 것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묘사하는 방식일 것이다." 즉, 어슐러 르 귄은 과학소설이 신화적이고, 묵시록적이고, 영웅주의적이며, 기술주의적인 이유는 과학이 지배의 도구로서 (길고 딱딱한 걸 소유한) 영웅들의 서사를 위해 복무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과학을 하나적 문화적 용기a cultural container로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로운 형식의 SF(과학소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용한 것, 먹을 것, 아름다운 것을 담을 수 있는 가방, 바구니, 나무껍질인 잎, 머리카락으로 엮은 그물"인 가방은 사회적 관계들도 담을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나아가 "집이 되고, 성지가 되고, 박물관이 되고,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인간적인 것이 그것으로 이해될 때 (남성이 아닌 존재로서) 모두가 "최초로, 완전히, 자유롭게, 기꺼이, 인간이 될 수 있다."


차이는 이야기에 있다. 아니, 이야기가 말해지는 방식에. 모든 주변부를 영웅의 이야기로 압축시켜 그들their의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영웅his 이야기로 변질되는 것에 있다. 그녀는 2001 오디세이의 장면들을 언급하며 말한다. 폭력이 문명의 시작이며, 그것이 우주로의 정복을 이끌고, 결국에는 자궁도 없이 남성 태아가 만들어진다고. 그러나 한 방향으로 쾌속 질주하고, 꿰뚫고, 멈추지 않는 것에는 절멸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는 종말론적이고 묵시록적이다. 그러므로 살육자의 이야기 방식을 멈추고, 이야기의 새로운 방식을 찾는 것이 시급한 일임을 강조하며 모든 것을 담는 것으로서 이야기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힘들지, 불가능하지 않다. 맘모스를 죽이는 얘기 대신 야생 귀리를 줍는 얘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르 귄은 말한다. "I now propose the bottle as hero."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한 언어의 재발명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연장선 상에서, 무언가를 담는 것이야말로 최초의 문화적 장치였을 거라고 말하는 엘리자베스 피셔의 주장과 유사한 궤도를 그리며. 간략한 소개를 마치며 그녀의 끝나지 않을 이야기의 길로 안내한다. 별들을 위한 공간이 가득하고, 씨앗들을 충분히 담을 수 있는 이야기들...


This belly of universe, this womb of things to be and tomb of things that were, this unending story. (...) There is time enough to gather plenty of wild oats and sow them too, and sing to little Oom, and listen to Ool's joke, and watch newts, and still the story isn't over. Still there are seeds to be gathered, and room in the bag of stars.




전시 리플렛에선 어슐러 르 귄의 글 픽션–운반가방론을 간략히 언급된다. 어슐러 르 귄은 그 글에서, "소설의 적합한 형태가 어떤  자루, 어떤 가방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책은 단어들을 담고 있다. 단어는 사물들을 담는는다. 그것들은 의미를 품고 있다. 소설은  약상자이며, 특유한 것들을 가지며, 서로 간에 그리고 우리에게는 강력한 관계성이다." 이미 쓰여진 역사는 "찌르고, 베고, 죽이는  길고, 딱딱한 물체로부터 고안되고 그로부터 유래되어" 온 것처럼 서술되었지만, 그것에 의해 은폐되어온 수렵채집인의 이야기 방식,  "어떤 자루, 어떤 가방"의 형태로 다시금 만들기를 요구하는 것 아닐까?

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작업으로서 입구부터의 공간을 가득 채운 영상 작업인 [피아노는 옮기기 너무 무거워]는 원시인류의 모습으로부터,  수렵채집으로 삶을 영위하던 원시인의 모습을 본떠 재구성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가상적 공간에서, 수렵채집 활동을 끊임없이 행하는  그녀는 그녀 사방으로 수많은 점들이, 원들이 방대하게 흩어져있다. (각기의 원들은 전체를 이루는 포인트 클라우드의 개별적인 입자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방대한 데이터의 영역에서 연결을 기다리는 각기의 노드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들은 "각자가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each fragment has its  own beauty". 그녀의 작업들은 어슐러 르 귄이 말한 채집인carrier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야기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기는 것들로 인해 매번 변화하고 달라진다. 우리는 그 덕에 (수렵채집인을 절멸시킨 살육자에게) 관측되지  않은 가능성의 세계로 접어들고, 새로운 역사의 서술 방식을 획득한다. 그녀는 새로운 이야기의 방식을 미래로 투사하기 위해, 고고학적 발굴을 계속해나간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작업 속에서 찾게 되는 것은 기존의 역사만큼이나 풍부하고 다채로운 대안 역사들이며, 이를 통해 미래로 수렵채집인들의 이야기 방식을 투사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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