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존과학자 C May 08. 2023

중첩된 세계, 그 다수성에 대하여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다중 세계의 우주론적 정치학에 대한 단상」

본 글은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다중 세계의 우주론적 정치학에 대한 단상」과 퀑탱 메이야수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을 기반으로 쓴 내용입니다.


과학 밖 소설

fiction hors-science, FHS


퀑탱 메이야수는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에서 "과학 밖 소설fiction hors-science(FHS)"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칸트 이후로 생겨난 비판철학, 상관주의correlationism에서 벗어나 세계를 실재하는 대상으로서 사유하고자하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문학적 확장이다. 그의 사변적 사유는 "흄의 문제"라고 알려진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쉽게 말하면, 어제의 당구공에 대한 경험이 오늘의 당구 시합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이다. 경험이 과거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오늘의 경험이 내일은 지속되지 않는 것에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지적하며, 오늘날 귀납적 지식이라는 지면 위에 서있는 (실험)과학을 자연과도, 우리의 의식과도 분리시킨다.


정리하자면, 이 책에서 드러나는 메이야수의 비판은

1. 우리가 인과적 필연성이라는 논리적으로 보장받을 수 없는 단지 관습일 뿐인 가정을 바탕으로 귀납적 학문들(특히 실험과학)을 발전시켰고,
2. 외부 세계로서 물자체를 인정하나, 그럼에도 그것을 인식 주체인 인간의 오성의 범주 내로 종속시킨 칸트의 주관주의 덕에 객체는 언제나 (주관적) 객체가 되어버렸고,
3. 이 결과로서 상관주의는 세계라는 객관적 대상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요구하는 바는 객관적 대상으로서 사유 가능한 세계의 회복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의 하나로서, 새로운 문학 장르 "과학 밖 세계에 대한 소설"을 제안하는 것이다. 상관주의 철학이 세계라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언제나 자의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모든 학문을 인식론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메이야수의 제안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실재와 존재, 주체와 객체의 존재론적인 전회에 대한 시도이다.


결론에 다다르러 메이야수는 가능한 과학 밖 세계의 유형으로서 FHS-2를 제안한다. 

    "이 세계들은 그 불규칙성이 과학을 폐지하기에는 충분히 강하나, 의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세계들이다. 따라서 이번에 이 세계들은 진정한 과학 밖 세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60) 메이야수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는 법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에 대한 연대기를 작성할 수 있을 뿐이라 말한다. 이곳에서 사물들은 우발적으로 사고를 일으키고, 물질적 대상들이 궤도 이탈을 일으키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은 엄밀하고 정밀한 법칙을 정립할 순 없으나 불확실성 위에서 통계적 경험을 바탕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자연을 통해 "과학과 의식의 가능 조건들을 떼어내는 일"은 가능할 것이라 전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의심스럽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의 사유 과정은 칸트 이후의 뿌리깊은 철학적 전통을 반대한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게다가 흄의 문제를 통해 그동안 문제 없이 작동하던 인과성의 법칙이 한 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극적인 가정을 탐구하기 위해 논리적인 차원으로 이행해 사고 실험을 진행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그럼에도,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궁핍해진 시기에 내려진 극약처방이라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었다. 메이야수의 제안처럼 FHS-2, 즉 실제로 인과적 필연성이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는가? 오히려 이 시도는 많은 사조들이 그런 실수를 범하듯, 단지 자구하기 위한 몽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세계의 다수성

Plurality of Worlds


작가 김아영의 전시「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Prosity Valley, Portable Holes」의 전시 도록에서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비평을 수록한다. 그것이「다중 세계의 우주론적 정치학에 대한 단상」이다. 이 글에서, 레자 네가레스타니는 다비드 루이스의 저서인「세계의 다중성에 대하여On the Plurality of Worlds」의 아이디어를 간략하게 소개하며 이렇게 적는다.

어떤 세계 W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 세계 W에서 흰 까마귀가 존재한다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흰 까마귀는 존재하는 것이다.

다수의 가능 세계는 (...) 상상적 허구가 아니다. 간결히 말하면, 이러한 가능 세계들이란 우리의 불가사의한 상상의 레퍼토리가 아니다. 가능 세계란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과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의 실질적(de facto) 한계라 불릴 만한 것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면 인과적 단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요컨대 불가능의 세계에서 가능 세계로, 그리고 그로부터 명백하게 실제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 

그의 말처럼, "감각-지각적 인지체"로서 우리는 이미 실질적인 한계 안으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라캉이 대타자로서의 언어에 대해 "우리는 언어 속으로 태어난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근본적인 한계 외부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레자 네가레스타니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의 목표는 루이스의 다수 세계에 대한 가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이를 감각-지각적 인지자로서의 우리가 세계를 형성할 때 직면하는 한계와 가능성에 관한 사변적 논제로 다루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수의 가능 세계 간의 인과적 단절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이를 위해 나는 서로 상이한 세계들을 연결하는 김아영의 사변적 네러티브를 이미 우리가 사는 부식된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를 새로이 상상하기 위한 가정적 논제로 채용할 것이다.

이미 주어진 현실, 경험하는 현실을 수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사변적인 태도를 취하는 순간 상황은 급변한다.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연역하기를 그치고, 인간중심적인(주체 중심적인) 태도를 거두고, 세계를 주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서 본연의 위치에 돌려놓을 때, "인간 정신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완성된 총체가 아닌 완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부식된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를 새로이 상상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사변speculation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해해선 안 될 것은 이러한 다중 세계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인지 능력을 새로운 기술로 대체하거나 극한으로 끌어올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결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오해가 바로 메이야수가 지적한, 칼 포퍼가 흄의 문제를 풀어내는 데에 있어서의 오류이다. 예를 들어, 해는 하루에 한 번 진다는 귀납적 지식은 극지방에서 자정에도 해가 뜬다는 사실로 인해 틀린 것이 되었지만, 이것이 다중세계를 예시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의 발견은 다중 세계를 예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물리학이라는 분야를 새로이 펼쳐냈을 뿐이다. 만에 하나 우리가 다중세계의 존재를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은 소위 '패러다임'을 뒤집을 만한 충격적인 발견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도 소화 불가능하기 때문에 (러브 크래프트 소설에서 등장하는 크툴루적 존재의 강림처럼) 외려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감각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중 세계란 인류의 발견을 기다리는 지하 깊은 곳에 '잠재해' 있는 미발견 천연 자원과 같은 종류가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지면 위에서 동일한 부피를 차지한 채 지금-여기에 '실재하는' 세계일 것이다.

메이야수와 레자 네가레스타니 모두 사변적인 사고를 고착화된 세계를 탈피하는 도구로서 사용한다. 그럼에도 주지할 것은 그들이 개인이 경험하는 주관적 세계의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메이야수의 시도는 칸트가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우리가 "침묵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던 세계를 실재로서, 그리하여 우리가 직접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지위를 돌려놓는 것이라면,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작업은 그에 반해 개별적 삶이라는 층위에서 SF의 형식으로 서술된 김아영의 사변적 서사가 우리 개인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조망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둘의 작업이 완벽히 공명한다고 보긴 힘들지만, 둘 모두 (사변적 실재론으로 분류되는 철학 분파들이 그러하듯) 상관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조응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찾아오는 두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감각-지각적 인지체"로 태어난 바람에 본질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 있어 한계를 타고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어떻게 그 경계를 성공적으로 넓혀갈 수 있는가?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이런 사변적인 서사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첫 번째의 해답은 사실상 두 번째 해답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순수한 논리 속에서만 가능한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메이야수가 구출해내려는 건, 세계라는 실재이다. 아니, 어쩌면 메이야수가 구출하려는 건 어느날 갑자기 모든 규칙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라는 실재이다. 그가 제기한 문제처럼 어느 한 순간 모든 인과성의 법칙이 어긋나게 되는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인과성이라는 원리 하나로 세워진 듯한 세계를 단순히 격파하기 위한, 즉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유의 대상으로서 끌어들일 수 있는 절대적인 실재가 한없이 우연적이라는 것에 있다. 이 세계가 인과성을 따르게 된 것은 완전히 우연일 뿐이다... 옮긴이의 말을 이곳에 옮긴다면, "세계에 대해 유일하게 필연적인 진술은 바로 이 세계가 우연적이라는 진술이다"(103). 그러므로 100페이지에 남짓한 글을 읽으며 (철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 얻을 수 있는 해답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만큼이나 실재적이라는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신이라는 한계를 넘어 사유할 수 있는 초석이 된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서 자신의 한계를 넓혀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자세가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도덕은 불가능해진다. 거대한 시스템 내에서 우리는 무수한 연결을 이루는 노드가 된다. 노드로서 우리는 연결 속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사물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쾌락과 욕망의 원리로만 작동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도덕이다. 다시 말해, 시스템 속을 부유하는 무수한 이미지, 텍스트, 영상, 그림, 영화, 하물며 햄버거나 생수병, 나아가 시위나 행진, 사랑과 봉사 등 모든 사물들의 미세한 틈 속에서 일종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란 결코 우리가 직접적으로 겪지 못할 것으로서의 타인의 삶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형식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만큼이나 실재적"임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하며, 이것이 실종된 곳에서 우리는 지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첫 번째 질문, 인간은 어떻게 개별적인 감각-지각적 경계를 성공적으로 넓혀갈 수 있는가, 에 대한 답변은, 이야기이다. 이야기야말로 예술의 본질적인 기능이며, 가능 조건이다. (조심스럽지만, 현재의 예술–특히 자본과 결합한 예술들이 갖는 문제가, 바로 이야기로서 기능하는 게 아니라 경험으로서만 소비될 뿐이기 때문은 아닐까?)




조금은 더 개인적인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사변적'이라는 단어는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등재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사변speculation의 가치가, 한편으로는 균형이 무너진 사고를 묘사하는 듯한 이것의 가치가 불가능을 불가능으로서 사유하는 데 있다고 본다. 자신의 경험이 완전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외면한 채 오직 논리적으로만 가능한 세계를 상상하는 것. 그리하여 유일함을 특권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한계로서 사유하는 것. 그리하여 메이야수는 세계를 유의미하고 객관적인 사유의 단단한 대상으로서 되돌려놓으려 시도한다. 이것이 철학의 새로운 돌파구가 되기를 기대하며. 그러나 주지할 점은 대상의 위치에 세계를 돌려놓는 것이 그것과 관계맺는 존재로서 우리가 동일한 형식으로 경험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는 단일할 수 있으나, 그것과 관계하는 개인으로서 체험하는 세계는 여전히 주관적이고 여전히 다양할 수 있다.

현대물리학은 물질이 사실상 원자 단위에서는 확률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운동하는 전자는 우리가 보지 않을 때 가능성으로서만, 확률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측하는 순간, 전자는 가능성을 잃고 하나의 경우만을 갖게 된다. 이 양자역학이 말하는 관측이 세계와 인간이 관계함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인간과 관계해버린 세계는 더이상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굳어지지만, 반면에 우리와 관계하지 못한 여분은 늘 남게 되고, 그 광대한 여분의 영역에는 불가지한 존재들이 요동하고 있지는 않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동시에 몇 가지의 가능한 미래를 이미 겪어본 것처럼 느끼기도 했고,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미래로 뛰쳐나간 나의 일부가 멀리서 나를 향해 노스탤지어를 가득 품은 아련한 미소를 전하는 것을 본 적이 있고,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미래가 과거만큼이나 이미 낡아버려 하등 차이가 없다고 느낀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이 여분에 대한 나의 사유라고, 혹은 초월적 체험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배수아는 적극적으로 이런 것들에 대해 말하며,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한 적 없다고 느끼지만 한 번도 이해해야만 한다고 느낀 적도 없으므로 그녀의 글과 그녀를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전혀 없다. 어차피 우리는 상호간의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로 중첩된 채 각자의 자리에서 박동할 뿐이고...


내가 메이야수의 사유의 의의를 '불가능을 불가능으로서 사유하기'라 말하는 이유는 인간의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나의 신념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이 세계에 내려진 저주는, 서로 소통이 불가능함에도 외부로만 향하는 신체 기관들을 타고난 탓에 있다. 존재에 대한 감각을 타자로부터 구할 수 밖에 없으나, 결코 타자와 성공적으로 소통하지도 못하는 존재들의 세계. 그러므로 모든 사물이 동시에 거울이기도 하다는 말은 세계에 뿌리내린 저주를 극복하기 위한 소통의 행위, 그리고 그것을 위해 고안된 언어의 본질을 함축한다.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소통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건 타자가 아니라, 타자에 반사된 자신의 일부이므로. 그러나 (적어도 같은 종으로서) 동일한 저주에 처해진 타인들과, 넓게는 사물들까지도 비슷한 운명에 처했을 거라 짐작하는 것은 우리가 타고난 공감의 능력이다. 이 지점에서 중첩의 감각, 불가능에 대한 사유는 그 무게를 갖는다. 불가능함을 아는 것과 불가능이 불가능함을 아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소외지만, 후자는 말했듯이 공감이며 공생의 원리이다. 그것이야말로 유토피아라는 공상에 불과한 비-공간을 사변을 통해 열어젖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소통의 불가능성에도 굴복하지 않고 타인과 관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자, 때로는 너무나 가깝게 여겨지는 무(), 그리고 소멸에 저항하는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뒤늦은 소회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동시에 몇 가지의 가능한 미래를 이미 겪어본 것처럼 느끼기도 했고,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미래로 뛰쳐나간 나의 일부가 멀리서 나를 향해 노스탤지어를 가득 품은 아련한 미소를 전하는 것을 본 적이 있고,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미래가 과거만큼이나 이미 낡아버려 하등 차이가 없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배수아는 적극적으로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며,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한 적 없다고 느끼지만, 한 번도 이해해야만 한다고 느낀 적도 없으므로, 그녀의 글을–나아가서 그녀를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전혀 없다. 다만 우리는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로 중첩된 채 각자의 자리에서 박동할 뿐이고...)

나는 위에서 이렇게 썼으나 동시에 쓰고 싶지 않았고, 그리하여 나는 괄호로 묶고 글자의 색을 흐리게 했음에도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차마 지울 순 없었다. 나에 가장 가까운 문장, 예컨대 일종의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쓰며 나는 고통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이, 단지 언어라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쉬운 도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리도 쉽게 쓰여진 것일까? 나는 늘 내안에서 불거져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말해지거나 쓰여지거나 그려진 것들이 늘 사실이 아니라는 의심에 사로잡힌다. 나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지닌 듯해지고, 말해진 것은 언제나처럼 내 것이 아니라 한없이 타자의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나는 다만 언어의 숙주가 되어 말하도록 요구된 것을 내 것인 마냥 써내려갈 뿐일지도. 빌렘 플루서가 말하듯, 단어에 내재된 역사가 너무나 장대하므로 단어는 그 자체로 다른 단어를 이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쓰인 글을 재차 읽는 순간 그건 분명 내가 썼음에도 내 것과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어버리곤 하므로...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내재한 괴리감은 나의 글쓰기 행위 자체를 거짓으로 만들고 만다. 그러나 나는 다중 세계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쓰고 싶지 않았던 저 문단은 다른 글 속에 옅은 글씨와 괄호에 갇힌 채라도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메이야수의 사유로부터 이끌어냈던 원리, "불가능을 불가능으로서 사유하기"는 알아내기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상태로 둠에도 그것이 사유될 수 있다면, 실재한다고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고독을 고독으로서 인식하고 이겨내게끔 도와주는 셈이다. 타인이 증언하는 고독의 감각을 마주함으로써 나는 내가 느끼는 고독을 수용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춘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자꾸 다른 책을 집어들어도 같은 책을 읽는 듯한. 단순한 외견적 차이만을 가진, 약간 다른 색감과 미감으로, 자모음만 대체된 이름들로. 그런 이야기들은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는 그런 것들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며, 때론 불필요하다고까지 여긴다. 사소한 차이 때문에 A라는 책과 A'라는 책을 모두 읽기엔 나는 너무 유한하다. 대신,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서술된 이야기에 더 큰 흥미를 느낀다. 맹목적일만큼 이해를 요하지 않는 분노, 청자를 고려하지 않는 폐쇄적인 서술, 몇 백 페이지 전체를 가득 채운 개소리들, 이미 삭을 대로 삭아버린 언어로 얼기설기 엮어놓아 곧장 바스라질 듯 유약한 문장들. 다시 말해, 유난히 맹목적인 글들.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대부분은 이러한 글들을 쓴다고 느껴진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그리고 나는 그들 또한 자신이 쓴 것에 대해 견디기 힘들 만큼 괴리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하고 기대해본다. 언어의 속성이 그러하므로.)

그러나 기이하게 뒤틀리고 기울어진 이야기들이 사실은 내가 사는 세계 위로 포개진, 수없이 중첩된 세계를 증언하는 글들이 아닐까? 개별적 인간으로서 갖는 결함과 문제, 부정과 타락, 트라우마와 재난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쉽사리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자신의 실재를 증언하는 글들. 나는 그런 글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식임을 알기 때문에...

작가의 이전글 <LOAD: 미래수렵채집사회> 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