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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May 13. 2023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문학과지성사)에 대한 서평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아무것도 무의미하지 않았다. 모든 행위가 유의미했으며 의미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음을 뜻했고 그것은 영원불변의 법칙이 존재함을 뜻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영원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지상 위의 것들 가운데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나. 우리의 개체적 운명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유한하다. 그러나 필멸하는 존재에 의해 끊임없이 연장되는 역사는 어떤가? 답변: 20세기 말엽에 누군가는 역사에게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그 답변에 대한 답변: 소비에트의 역사를 상수처럼 취급하지 마라. 냉전 시대를 통해 겪은 소련의 경로를 지금의 사회주의도 동일하게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해선 안된다.

어쩌면 정말로 가능한 미래 속에서 영원히 자본주의가 패배하지 않는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세계의 멸망보다 자본주의의 멸망이 더 상상하기 어렵다는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처럼 자본주의는 어쩌면 어떤 적이든 포섭하고 자본의 논리로 재단할 수 있는, 가축의 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손 놓고 물러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영속하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상식적이라고 (확률적과 상식적은 동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동어반복의 오류.) 하더라도, 우리는 어느 순간 역사의 보존 메커니즘이 오작동하고, 우연히 돌연변이를 토해내기를 기다린다. 미래는 무엇보다도 아직 불확실의 영역이므로. 자본주의가 진정한 미래마저 자신의 가축으로 만들기 전에 우리는 반란을 꾀해야 한다! (문득 이러한 디스토피아에 대한 단편이 떠오른다. 스타니스와프 렘의『앨리스타 웨인라이트의 「존재주식회사」』가 짧고 유쾌하다.)


역사의 종언은 소련의 붕괴로 인해 더이상 경쟁을 통해 새로운 정치체제가 나타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전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산주의의 묘비 앞에 놓인 묘비석이다. 진정으로 무의미해진 것은 공산주의라는 시스템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혁명 그 자체다. 혁명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사는 현재의 정지돈은, 과거의 공산주의라는 혁명을 달성하고자 했던 정웰링턴을 통해 지금의 시대를 사유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화자가 정지돈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그는 무엇보다 먼저 털어놓는다. 추리하거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자신이 쓰려고 한 것은 전기가 아니라, 단지 아주 드물게만 드러난 정웰링턴이라는 인물을 경유한 어떤 글일 뿐이므로 무엇보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과거는 정지돈을 통해서 현재와 접속하고, 현재와 접속한 과거 속에서 미래를 위한 영원불변한 것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시간은 유동적으로 재배치되며 현재의 정지돈을 관통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장부호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문장들은 쉼표와 온점으로만 구분된다. 이 불친절하게 구획된 정체성 사이에서 사유와 행위, 묘사와 대사는 인물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이기 시작한다. 경계는 모호해지고, 때로는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든다. '나'라는 1인칭 대명사는 어느 순간 지시 대상을 잃어버리고, 모두의 위치를 경유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물은 '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이라는 대명사로 서술된 문장들은 동시에 독자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우리는 '나는'이라는 단어를 읽어들이며 '나'의 성분에 나를 포함시킨다. 그런 식으로 '나'는 글의 안과 바깥을 넘나들며 점진적으로 우리가 된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개체의 단수성과 자율성이라는 판타지"는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 않는" 우리를 고립되게 만든다. 비로소 문제적인 것은, "정치적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정지돈은 또다른 책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유토피아란 말은 now-here(지금 여기)가 아니라 no-where(없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 유토피아적 사고의 가치는 당대의 경험과 정치적 욕구들 사이에 공간을 창조하고, 그러한 욕구들을 새로운 형태의 정치 건설에 낙관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영원했다,는 그의 말에서 영원한 것은 어떤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이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영원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진정으로 영원한 것은 "영원불변의 법칙"이다. 다시 말해, 사유의 방식이다. 영원한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적 사고이며, 보존되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보존 메커니즘의 오작동에 의한 돌연변이의 발생이다.

우리는 만연하는 종말론과 변화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영원한 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영원했다.


문장 위로 표지의 노이즈처럼 향수nostalgia와 애수melancholia가 엷게 쌓인다. 그러나, 왜?


책 표지 위로 자욱하게 끼인 노이즈는 마치 사진을 다가갈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드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며 판타지이다. 이미지는 향수와 애수를 의미할 수 있지만, 노이즈는 그렇지 못하다. 노이즈는 단지 그 당시의 기술적 조건을 건조하게 드러내는 이미지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노이즈를 보고 향수를 말하는 것은, "아날로그적"이라는 괴상하고 불확실한 표현처럼 단지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하는 대로 치부하는 건 아닌지.

과거형의 서술 또한 노이즈에 대한 접근과 많이 다르지 않다. 과거형은, 과거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할 뿐이다. 어제 먹은 밥에 대해 말하듯, 정웰링턴이라는 몇십 년 전의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영원했다는 문장에 향수와 애수를 덧입히는 건 우리고, 그것이야말로 변화와 반란을 영영 멀어지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위해 몇 번이고 다시 읽어줄 것이다. 그것이 "실패할 것임을 알더라도."

모든 것은 영원했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모든 것은 영원하다.

(...)




문명과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그 곳에 남는 것은 개체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인공적 보형물일 것이라는 디스토피아를 상상한다. 개인을 넘어서는 개체는 없다는 것은 종말론적이다. 우리는 개인이라는 초월적인 개념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개인이 되기 위해 세계의 나머지와 투쟁하다 죽을 것이다,라는 묵시론. 그렇다면 근미래를 위해 인류는 내세론을 가열차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절망 속에서 서서히 사그라들 모든 존재들을 위한 새로운 낙원을! 그러나. 그러나, 낙원 중 낙원은 지상의 낙원이라 하지 않았던가...

서울은 특히나. 밀도는 한계를 넘어섰고, 우리는 수직축과 수평축을 따라 축적된다. 우리는 고독하고 싶을 때마저 홀로 있지 못한다. 타인은 이제 존재만으로도 불쾌하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안온함을 원하는 방식으로 얻을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밀도로 설명되는 도시에서는 지면 위의 어느 한 켠도 우리를 위해 공짜로 내어주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마저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빽빽한 대중교통에서 시선은 방황한다. 시선의 시점은 나의 동공이 아니라, 그 시선이 닿는 곳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보고 싶은 곳을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어느 곳을 봐야 타인들이 불쾌하지 않을까'가 된다. 귓전에서 들리는 가래침 끓는 소리, 시끄러운 통화 소리, 듣기 싫은 말투와 어조. 우리는 기꺼이 노이즈 캔슬링을 구매한다. 그러나, 노이즈 캔슬링이라 말할 때의 노이즈는 어떤 것들을 포함하는가? 잠재적 위협과 스트레스가 될 수 있는 모든 외부의 존재자들?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다다른다. 개인이 최선이다. 나부터 살아남자. 나를 지키기 위해 모두를 적대시한다. 자유지상주의와 개인주의는 언제나 상충하는 개념이지만, 그 둘은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공존한다. 역설은 시스템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불합리한 상황을 외부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어차피 역설 자체가 우리가 밟고 사는 지면의 논리이기 때문에. 한때는 공동체가 개인들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었지만, 이제 개인은 공동체를 넘어서는 존엄한 무엇이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필수적인 가치가 아니라 지상적인 가치가 된다. 그것은 지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개체가 개인이 되려고 몸부림칠 때마저도 역설적으로 우리는 연결을 갈구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서울을 떠나지 못한다. 왜냐면 결국 우리를 존재하게끔 하는 것이 무엇보다 연결이며 관계이다. 타인의 존재 없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모자와 후드, 마스크와 노이즈 캔슬링은 모든 감각으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지만, 우리는 그 무엇보다 풍부하고 많은 연결을 지시하는 스마트 기기들에 감각의 말단들을 집중시킨다. 거기에서 현실을 충분히 보상해줄 어떤 대안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그러나 지극히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정체성은 정치를 더이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호교차성은 범주를 세분화한다. 단 하나의 차이만으로도 서로의 경험은 공유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이 궁극적으로 서로에 대해 침묵해야 함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경험이 환원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각자의 경험의 총합이 단순히 다수의 경험, 혹은 사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다수성의 정치는 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통해 스스로를 존속해왔다는 것을 고발하고자 함이다. 우리가 그로부터 이끌어내야하는 결론은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경험에 귀를 열어야 한다,이다. 적대적인 정치를 공고히하고자 함이 아니라, 적대적 정치 자체가 기능할 수 있는 지형을 파괴했을 때 도래하는 공동체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이다. 거기서 개인은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다. 파편화되고 분리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확보한다. 전체로서의 세계와 그 부분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대상으로서 세계와 또 다른 대상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성이 동등하게 관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어떠한 사유의 결과물은 단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방식은 미래를 상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과거의 경험들로부터 어떤 원리를 연역해냄으로써 미래를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태 중에서 경우들을 지워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확률론을 무화한다. 99%의 가능성을 지닌 미래와 1%의 가능성을 지닌 미래는 순차적인 시간 속에서는 99배의 힘을 지니지만, 선형적 시간관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99%의 미래와 1%의 미래는 동일한 무게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사변적이고 희박하든 간에, 미래의 한 종류로서 현재로 투사될 수 있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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