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s Ornament>, 유튜브, 올빼미의 없음을 경유하는 글
1927년의 <Mass Ornament>와 2009년의 <Mass Ornament>, 유튜브와 배수아를 경유하여.
크라카우어는 1927년의 <대중장식>에서 틸러걸즈로 대표되는 대중 문화를 당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드러내기 위한 지표로서 사용한다. 국경과 지역을 초월하는 대중(mass)의 등장, 중산층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여가시간(leisure time)을 채우기 위한 문화의 산업적 생산(distraction factory, culture industry), 추상화(abstraction)하는 이성. 이 모든 것들은 틸러 걸즈의 무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로부터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탈리 북친은 2009년의 동명의 작업, <대중장식>을 통해 동일한 시도를 기획한다. 다만 북친은 댄서들을 유튜브라는 가상이자 플랫폼인 공간에서 찾는다.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로 통칭되는 현재의 시스템과 자본주의라는 말로는 불충분해진 새로운 경제적 조건을 탐색한다. 그리고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로서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서 동일한 춤을 추는 댄서가 되어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의 패턴을 구성하는 부분으로 기능한다.
북친은 그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미지들을 한 자리에 모아 구성함으로써 이러한 조건을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녀의 주장과 힘은 여기서 발생한다. 그들을 한 곳에 집결시키고, 그리하여 우리가 처한 조건을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것.
1927년의 틸러 걸즈는 동일한 무대 위에서 춤을 췄고, 2009년의 우리들은 동일한 플랫폼 위에서 춤을 춘다. 다만, 그것을 통일된 전체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현재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우리를 가장 개인적인 영역으로 후퇴시킨다. 우리가 춤추는 배경은 어질러진 방, 어수선한 거실, 식기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진 부엌이다.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신체적 조건과 물질적 조건을 바탕으로 안무를 수행하며 그것은 아주 드물게만 동시성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모든 타인과 구분되는 단일한 개인으로서 적절하게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개인이라는 느낌은 환상이며 또다른 형태의 억압이다. 내가 너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네가 나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은 그 어떤 공동체의 형성도 불가능케 한다. '안무'라는 정해진 형식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사회의 표면에 현상되지 못한다. 우리는 플래시몹처럼 거대한 패턴을 이루는 부분이 될 때에만 간신히 표출된다. 이제 유튜브에서 더이상 정말 개인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유튜브는 단순히 알고리즘으로 설명될 뿐이며, 조회수를 가장 잘 뽑아낼 수 있는 썸네일만 있을 뿐이며, 구독자 수, 조회수, 수익과 같이 경제적으로 환원 가능한 요소로만 설명된다. 소비자이자 생산자라는 표현은 이제 낡아버린 아메리칸 드림처럼 들린다. 유튜브는 텔레비전이나 방송국이나 스튜디오의 전초기지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러나, 유튜브에 업로드된 가장 첫 영상의 제목은 Me at the zoo이다. 분명 그 공간은 한때, 나me를 위한 새로운 공간이었다. 일견 지금은 더이상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정말 그런가? 이제 유튜브는 '나'라는 정체성 표현을 위한 대안적 가상 공간이 아니라 단지 거대 산업industry의 한 부분department일 뿐인가?
며칠 전 알고리즘의 부산물처럼 한 채널이 나의 피드에 등장했다.(내가 부산물이라 말하는 것은 언제부턴가 이런 채널들이 내 피드에 뜨는 것 자체가 오류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튜브가 산업화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방진이'라는 건조한 이름을 지닌 채널은 목소리도 하나 없이 자막으로만 이렇게 고백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걱정해주는게 뭉클했던 거 같다. 악플보다 저런 댓글이 더 이해가 안 갔었다. 내가 선행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유용한 정보를 주는 영상도 아니고 솔직히 득이 될 만한 사람은 아닌데 저런 애정어린 댓글이 이해가 안 갔다. 애정에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이유 없이 좋다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그 말은 이유 없이 싫어지기도 한다는 거니까. 이유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힘든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모두 표현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나의 일부가 아니며, 내가 이 공간에서 드러내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미 개인의 정체성의 표출과 그것의 연결이 단순히 전시가치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진실은 드러낼 것이 못되며, 우리는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형태로 자신을 재현하는 중일까? 그리고 그 받아들여지는 형식이 일종의 '안무'이며, 그 방식을 경유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기에 그것이 자신을 완전히 표출하는 진정한 의미의 '춤'이라는 수행적 행위일 수 없다는 표현인가?
나는 최근에 이 세상을 떠났던 다른 채널의 인물을 하나 떠올린다. 우리는 그분을 위로하기도 했고, 같이 기뻐하기도 했으며, 그분의 삶을 나눈다는 착각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돌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가 무언갈 나눴다는 감각은 순전한 착각이었나. 우리는 위로했고 우리는 함께 기뻐했고 함께 가여워했지만 그 사람은 떠나야만 했을까.
하지만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우리는 삶의 동기를 잃어버린다. 강탈과 탈취, 폭력이 도덕을 짓밟을 것이므로. 우리는 가시적인 것들의 이면을 상상해야만 한다.
내가 방진이의 고백으로부터 느끼는 안타까움, 유명을 달리한 어떤 사람에 대한 슬픔과 고통은 무엇보다 실제적이다. 이 감정들은 물질적 실체를 변화시킬 수 있으므로, 그것은 현실을 바꾸는 힘을 가진 환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초월적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지표이다. 우리의 물질을 변화시킨다면, 감정 또한 하나의 물질적이다. 가상 또한 물질적이다. 모든 가상적 연결은 물질적이다.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실제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나는 몇 번이고 배수아의 텍스트로 돌아온다. 그녀의 텍스트는 나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내가 그 텍스트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이것은 때에 따라 변하는 종류의 지식이나 진리, 사실에 관한 텍스트가 아니다. 차라리 운명이나 필연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앞에서 무기력하다. 그녀는 늘 말하기 위해서 쓰지만, 이번만큼은 말하기 위해서만 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의 탓이므로, 이런 옷을 입는다고. 살아 있는 자가 곧 죽음의 원인이므로 우리는 죄의식을 가진다고. 우리가 자라나는 동안 한 사람이 늙어갔으므로. 우리가 건강한 동안 한 사람이 병들었으므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한 사람이 죽어 있게 될 것이므로.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는 것이므로. 한 사람이 죽고, 그리하여 남아 있는 자들의 죽음이 보류되는 것이므로. 이 세계의 상태를 하나의 문장으로 나타내자면 다음과 같다: 자연은 조화를 유지하고, 인간은 운다.
나는 더러 이 텍스트를 남들 앞에서 꺼냈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필연적이고 거대한 법칙에 대해 우리에게 허락된 건, 진술 외에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칙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필멸자라는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것은 그 가설을 몸소 증명하게 될 개별자로서의 우리들이므로. 그리고 누군가를 필멸케 하는 건 다름 아닌 우리가 그 속으로 태어나는 자연이며, 자연의 섭리가 우리로 하여금 죽기를 요구하므로. 탄생은 그런 의미에서 모든 죽음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운다"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지시한다. 그것은 자신의 이면적 층위에 "자연은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므로. 자연은 우리가 초월할 수 없는 종류의 연결을 지시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타인을 위해 운다. 그러므로 구독자와 채널주, 서로 알지도 못하는, 가상 공간으로만 연결된 우리의 관계는, 조회수와 수익으로 환원되지 못하는 차원을 구가한다. 다만 우리의 사회 경제적 상황이 끊임없이 그러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할 뿐이다.
나탈리 북친이 무한한 공간 속에 외딴 섬처럼 떨어져 있는 댄서들을 한 곳으로 호출한 것은 이러한 연결의 비-물리적이지만 무엇보다 실제적인 차원에서의 가시화이다. 우리는 간헐적으로 일치하는 가상 공간 댄서들의 몸동작으로부터 쾌감을 얻는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연대할 수 있다는, 달라진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의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이기도 하다. 북친은 창window이라 불리는 이미지의 프레임들을 한 곳으로 모아, 그 곳으로 기꺼이 시선들을 불러모은다. 우리가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한계는, 서로를 향해 내어진 창 앞에서는 더 쉽게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춤을 추지만, 그 뒤로 드러나는 자신의 흔적들은 부산물처럼 관계 속으로 유입된다. 자아는 늘 의도치않게 유출되며, 그러므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딱딱할 때 마저도 어느 정도는 진실되다.
누군가는 말한다. 삶은 춤과 같다고. 춤은 자신의 신체라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며, 분리해낼 수 없는 물질적 실체를 통해 스스로를 표출하는 수행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춤은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되며, 그 어떤 춤도 내재적인 결말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쉼, 그리고 변화가 있을 뿐. 그렇기에 우리의 춤은 언제나 부분적이다. 완결성과 완전함은 환상이며, 결코 전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과 함께 춤추기 위해 손을 내민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어차피 춤은 끝나지 않아, 그러니 잠시 같이 춤춰보는 건 어때. 너는 너의 공간에서, 나는 나의 공간에서. 언제든 떠나도 좋아. 하지만 알아둬, 누군가가 섣불리 판단하고 평가할 때마저도, 네 춤은 멈추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