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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Nov 06. 2023

보존과학자 C의 하루

보존과학자인 C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침인지 밤인지는 분명치 않다. 해의 궤도와 관계없이 이곳은 늘 파리한 어둠으로 가득하다. 시간에 따라 단지 미세하게 색조를 달리할 뿐이다. C는 자신 앞에 놓인 일을 마주한다. 산산조각 난 것들. 파편들. 편린들. 조각들. 세부를 지칭하는 말은 없이, 단지 뭉치로서만 이름붙여진 것들. C는, 보존과학자라는 자신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파괴는 또다른 탄생이라 여긴다. 파괴라는 또다른 탄생의 행위를 구태여 거스르고, 이전의 형태로 복원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C는 자신의 잠자리 바로 옆에 놓인 스탠드에 불을 올린다. 사방이 틀어막힌–한켠에 자리한 창문 맞은편엔 거의 맞닿을 듯이 건물이 서있으므로 빛을 받아들일 수 없다–공간이 누런 불빛으로 점령당한다. C는 그 불빛을 좋아한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에 무관하게 늘 동일한 상태의 분위기를 형성하므로. C가 자신의 공간을 가득 메우는 그런 종류의 일정함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런 환경이야말로 C가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무색무취의 공간, 그 위에 얄팍하게 덮여있는 C의 흔적. 다만 C와 오랜 기간을 함께해 왔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사물들에 입혀진 C의 기운이 가물게 발산한 흔적. 그런 종류의 흔적은 그 좁다란 공간에서 자신의 짐을 다 빼는 바로 그 순간 모조리 사라지고 말 종류의 연약한 흔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C는 더이상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책을 사모을 뿐, 다른 것들을 들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C는 그 순간 이곳에 첫 발을 디딘 순간을 기억해본다. 얼마나 불만족스러웠는지, 얼마나 외면하고 싶었는지. 그러나 C는 그곳에 적응해냈다. 아주 기이한 방식의 균형으로. 늘 자신을 떠나고 싶게 만들어주는 무색무취의 공간, 동시에 쉬이 떠날 수 있을 만큼 가벼이 맺고 있는 자신의 집이자 방과의 관계. C는 언제쯤 떠나게 될까? 아니면, C는 떠날 수 있을까?

보존과학자.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본다. 자신에게 맡겨진 직업에 대해. 보존과학자. C는 언젠가 자신의 전시에 관한 전시를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파다했다. C는 보통 이런 식으로 자신이 직접 겪은 일과 들은 일, 본 일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C가 겪는 일들 중 대부분 시큰둥하다고 느꼈으나, 반면 자신이 듣고 읽고 보고 쓴 일이 마치 육체를 한 꺼풀씩 도려내듯 살벌한 감각으로 다가온 적도 있었으니. 그러므로 경험에는 깊고 얕음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본 (혹은 보았다고 생각한) 전시에서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보존과학자 C의 하루는 상처받은 작품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러 가지 보존 도구와 첨단 장비가 놓인 실험실 같은 C의 공간은 과학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상의 세계가 공존하는 곳이다. C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민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살피고, 손상된 곳을 발견하면 서둘러 작품을 치료한다. 작품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작품 속에 새로운 시간이 쌓여갈 수 있도록 돕는다. C의 하루는 작품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으로 완성되고 또다시 시작된다.”

C는 이 말을 읽고선, 자신이 보존과학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이 글에 쓰여진 보존과학자 C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가 써놓은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껴져 자신의 삶을 써놓은 것인지 자신의 삶을 써놓았다고 말했기에 자신의 삶을 써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었을까. C는 어쩌면, 자신이 이 글의 주인공 보존과학자 C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저 글에 등장하는 보존과학자 C인지 아닌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여겼을 뿐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신이 보존과학자라는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인지이다. C가 지금 당장 밝혀야 하는 것은 이것 뿐이다. 자신이 보존과학자가 스스로 된 것이라면, C에게는 다시금 복원해야 할 파편들이 있었던 것이고, 자신이 보존과학자라고 불린 것이라면, 산산조각난 무언가를 들고 C에게 찾아온 것일 테니까.

C는 다시 한 번 더 읽는다. 보존과학자 C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지금 당장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일들은 너무나도 사소하다. 단순히 누군가의 부서진 물건들을 갖다 붙이는 일일 뿐이다. C에겐 보존과학자로서 아주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보존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건 원래 그래야만 하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보존과학자는 가장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질 때 가장 높이 치하받는다. 아니, 이 말도 틀렸다. 가장 눈에 띄지 않으므로, 고작 집이나 회사에서나 치하받을 수 있을 뿐이다. 혹은 이렇게 가끔가다 누군가 주목해 줄 때나 드러나는 아주 비가시적인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이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C는 일어날 때 했던 생각을 곱씹는다. 파괴는 또하나의 탄생이다. 흔히 말하는 탄생은 단순히 물질의 변형,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기본 단위들의 배열일 뿐이지 탄생이라는 단어에 어울릴 만한 탄생은 없다. 그러므로, 탄생이 탄생이라고 불린다면 파괴도 탄생으로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물질의 새로운 배열이니까. 그러니 복원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도 발칙하게 보존과학자라는 직업을 유지하는 걸까. C는 보존과학자라는 자신의 직업이 어디서 왔는지 더욱더 궁금해질 뿐이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되는 순간 C는 이곳을 떠나리라 마음먹는다. 이런 마음을 먹은 지는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더 흘렀다. C는 떠날 수 있을까? 누런 불빛으로 가득한 자신의 공간 속에 희미하게 내려앉은–그래, 그건 딱 내려앉은 정도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입김만으로도 힘없이 질서를 잃어버리는 아주 나약하고 빈약한 균형–자신의 흔적을 훌쩍 걷어갈 수 있을까?

C는 씻기 위에 거울 앞에 선다. 거울엔 때가 가득해 사물이 제대로 비치지 않는다. C에겐 보존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먼지가 내려앉은 탁상, 커피를 쏟은 책, 머리카락이 쌓여가는 마룻바닥, 물때가 가득 낀 화장실 타일. C는 건성으로 샤워기를 거울에 가져다대고는 뜨거운 물을 쏟아붓는다. 점점 선명함을 되찾는 거울에 C의 얼굴이 비친다.

C에겐 새겨진 기억 하나와 그것을 증명하듯 이마 정중앙에 흉터가 하나 놓여 있다. 그것은 분명 '놓여' 있다. 그에게 새겨진 기억처럼. 세 살적, 할머니의 손에 놓여진 C는 부주의하게 넘어졌고, 문턱에 이마를 찧었더랬다. 사색이 된 할머니는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 황급히 아무 병원에나 C를 맡겼고, 상처를 봉합한다는 의사의 본분에는 알맞지만 전문성까지는 없었던 의사는 C의 상처를 되는 대로 꼬맸으며 그리하여 세 방향으로 뻗는 흉터를 얻었다. C는 그 상처를 생경하게 더듬어본다. C의 몸이 커가면서 눈으로는 보이지만 손으로는 그 형태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작은 흉터가 되었다. C는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해왔다. 보존과학자라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직업처럼. C는 그제서야 어슴푸레 깨닫는다. 보존과학자라는 자신의 직업은 아마 다른 이에게 의해 부여받은 것이라고. 자신은 결코 보존과학자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고. 비록 자신이 무언가를 조심스레 이어붙이고,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애쓴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결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만일 그랬다면 C는 넘어진 기억도 없이 놓여진 흉터를 자신의 것으로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경험과 기억의 실종, 그 대신 타인으로부터 양도받은 기억과 역할. C는 불현듯 자신이 그 이름을 부여받은 순간을 기억해낸다.

나는 한 손에 록타이트를 들고 있다. 성급하게 힘이 들어간 손에 의해 묽은 액체가 입구를 넘어 세모난 기둥을 타고 비져나온다. 나는 그것을 붙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붙여야만 했을 뿐이다. 부서지는 걸 원치 않았으므로. 그것이 산산조각나버리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나는 실시간으로 부서져내리는 너의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것을 붙들고선 록타이트를 성급하게 처바른다. 모든 파편을 주울 순 없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을 향해 떨어지고 있으므로. 바닥에 떨어진 것들은 단숨에 사방으로 튀어버리고, 도저히 어디서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100만 피스 짜리의 단색 퍼즐 조각처럼 도저히 복원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떨어진다. 인접한 조각을 잃어버린 너의 일부분들은 아무렇게나 이어붙여저 성급하게 록타이트로 채워넣어 점차로 제멋대로인 형태가 되어가고, 록타이트는 맹렬히 불타오르듯 열을 발산하며 순식간에, 그리고 한없이 차갑게 식는다. 식어버린 록타이트는 그 무엇보다 단단하고 거칠다. 이어붙인 너의 형상 주변으로 냉기가 찾아든다. 나는 열을 모조리 내뱉어버린 록타이트와 나 주변으로 휘몰아치듯 접근하는 냉기를 쫓아낼 수가 없다. 나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록타이트가 채 마르지 않은 자리 위로 내 눈물과 땀방울이 제멋대로 떨어진다. 나는 록타이트를 손에서 놓는다. 나는 최후의 발악으로서 아직 완전히 메우지 않은 구멍 안으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조각들을 주워 넣는다. 미세 유리가 박힌 듯 손가락은 자꾸만 따끔거리고, 그 손으로 눈물을 훔쳐낸 탓에 얼굴에서도 화끈거리는 열감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보존과학자다. 아니, 보존과학자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그러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왠만큼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것을 쓰다듬는다. 이음새는 불완전하게 메워져 그것의 형태는 기이해졌다. 이전의 유연성을 모조리 잃었고, 그 속에 품고 있던 온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 발짝 물러선다. 보존과학자가 복원한 작품의 운명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파괴되고 부서지지 않기 위해 모든 존재로부터 한 발 물러나야 한다. 일정한 거리 뒤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나 또한 그것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다. 고치려는 마음은 저것을 오히려 더 이상한 방식으로 구현하게 될 것이다. 내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것은 원본과는 영영 멀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깨닫는다. 내가 한 발짝 물러선 후에야 마주한 장면은, 바로 나이다. 내가 그렇게 성급하게도 이어붙였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그 순간 내 이마에 놓여진 흉터를 기억해낸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이어붙여진 무엇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서서 나를 이어붙인 나는 누구인가? 거울을 찾아야 한다. 거울. 거울만이 모든 것을 답해줄 것이다. 부끄럼이나 수치심도 없이, 열정이나 희열도 없이, 기쁨이나 행복, 그렇다고 우울이나 절망도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은 거울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거울의 가장 소름끼치는 점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그 거울 위에서 나는 내가 아니라 너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렇다, 보존과학자는 내가 아니라 너였고, 산산히 부서져내린 건 네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다만, 나의 조각들을 주워모아 붙이고 있는 너의 모습을 통해 자꾸만 나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그제서야 나는 묽게 흘러내리는 록타이트 사이로 스며들어간 눈물과 땀방울의 주인이 너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이제서야 알다니. 그러나, 그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이렇게 외칠 수 있었을까.

나를 이어붙이지 마! 그냥 부서지게 둬! 산산히 부서지고 파괴되도록!

파괴는 새로운 탄생이다. 나는 그것을 부서지는 순간에 알았어야 했다. 원래대로 이어붙이는 행위의 종착점은 가만히 멀리 두고서 보기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록타이트로 단단하게 붙들려있는 나는 눈꺼풀 틈으로 눈물 한 방울도 찌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나를 이어붙인 록타이트 사이로 불순한 것들이 섞여들어가는 장면을. 그 불순한 것들로 하여금 죽은 채로 살아있게끔 나를 붙들어매는 접착제를 부스러뜨리게 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는 완전히 바닥으로 쏟아지고, 무너지고, 또다른 탄생의 순간이기도 한 완전한 파괴를 겪어야만 한다. 나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외친다.

나를 부서뜨려줘! 나를 산산히 부서뜨려줘! 도저히 내 모습을 알아볼 수 없어도 좋아! 이 모습으로 다시 재건되지 않아도 좋아! 그건 아무래도 좋으니, 나를 부서뜨려줘!


나는 그날부터 C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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