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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Oct 30. 2023

새장 속의 알

상상농담 30. 르네 마그리트 <선택적 친화력>

  아픈 만큼 성장한다고 해서 부러 넘어질리는 없겠지요. 양푼이 되려고 모루 위로 올라가는 냄비가 없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성장판이 멈출 나이가 되었나요? '변화'가 문지방을 넘으려자마자 신발도 꿰지 못한 채 나가 빗장부터 걸어 잠급니다. 아~ 옥생각으로 세상사에 콩팔칠팔 따지고, 옴니암니 계산만 하지 거침없이 담대한 호연지기는 제 구석 어디에 숨어 있는지요. 어린아이가 청년이 되어가는 과정이 쉽지 않듯 청년이 장년이 되는 것에도 변주와 울림이 많은가 봅니다. 


  우리의 생각도 어린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장년이 되는 걸까요? 그 과정에서 넘어지고, 두들겨 맞고, 구부려지는 걸까요? 거푸집에서 틀을 뜨듯 세상을 모방하지 않고 나의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요? 작가는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지요. 철학하는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의 <선택적 친화력, 1933>을 소개합니다.   



르네 마그리트 <선택적 친화력, 1933>


  그의 그림은 인내심을 가지고 꼼꼼하고 천천히, 톺아 보아야 합니다. 그는 언어가 아닌 시각적 장치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니까요. 그리고 그 말들의 어원은 사전보다 우리의 무의식을 주소로 합니다.  


  새장에... 새가 없습니다. 알이 있습니다. 새가 태어나기 전인가요. 아니면 '새'가 갖고 있는 잠재적 은유의 뿌리인가요. 알은 너무 커서 새장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는군요. 알을 꺼낼 수 없겠어요. 약간의 희망을 갖고 매운 눈씨로 샅샅이 뒤졌는데 어디에도 문이 없습니다. '문 없는 새장 속에 꼼짝 못 하는 알'은 침울한 회백색 세상에 덩그마니 놓여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새장은 걸쇠에 걸려있지만 아래엔 지지대가 있습니다. 걸쇠가 필요하지 않았네요. 위 왼쪽 모서리를 보세요. 새장은 약간 앞으로 나와있지만 아래 왼쪽 모서리는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게다가 알은 어디에도 닿지 않고 홀로 서있는 듯합니다. 물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신비하고 조용하게 작가의 질문을 드러냅니다.  


  마치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에 갇힌 우리의 모습이 아니냐고? 


  뭔가가 될 수 있지만 아직은 알 수 없고, 담고 있기엔 크지만 꺼내기엔 문이 없고, 창살에 갇혀 있지만 '자유로운 비행(飛行)'이 본질이었던 생명체!  


  마그리트의 인생은 가끔 모루 위에 얹혔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의 잦은 이사로 친구 없이 고립되었고, 열세 살 땐 샴브르강에 빠져 자살한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자 벽지 공장에 제도공으로 일했고, 쥐떼가 습격한 듯 대공항이 휩쓴 가난한 시기를 버텼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땐 나치에 쫓겨 프랑스로 피난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였지만 아내는 그의 친구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삶에게 여러 번 세게 맞았고 심하게 비틀거렸습니다. 


  휘청거릴 때마다 그는 세상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구부러짐이 클수록 다른 각도와 다른 관점으로 변화했습니다. 청년이 장년이 되는데 치러야 할 대가를 고통스럽게 지불하며 자신의 작품철학을 견고히 했습니다. 그의 작품을 분석한 학자들은 미술사전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전치, 전위법)'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지금의 저는 청년인가요, 장년인가요.

  새장 속의 알인가요, 하늘을 나는 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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