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이 지나간 자국마다 '비'가 떨어집니다. 비는 도로 위를 튕겨나갑니다. 가로등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집니다. 낭창한 나뭇잎 사이를 구릅니다. 빌딩 꼭대기에서 푸르륵 날립니다. 도시에 내리는 비는 어디에도 스며들지 못합니다. 건조한 뉴욕의 인도와 웅덩이를 습기에 젖은 축축함과 우울함이 쓸고 갑니다. 차일드 하삼(Childe Hassam, 1859~1935)은 비 내리는 푸른 여름밤에 깨어 비가 마차를 타고 어디에 당도하는지 오래도록 지켜보았습니다.
차일드 하삼 <비 내리는 밤, 1890>
비에 젖은 도로는 야윈 가로등 불빛을 길고 길게 늘여 마차가 먼 길을 무사히 당도하도록 비춥니다. 노란색, 보라색, 흰색, 초록색, 검정색이 뒤섞인 나무는 마왕의 망토처럼 빌딩을 감싸 안습니다. 빌딩 꼭대기에는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 아스라합니다. 고개 숙인 피곤한 마부에게 밤이 속삭입니다.
'저 안개비 속을 내달리더라도 두려워 마. 이곳은 너의 도시, 너의 밤이야.'
잠들지 못하는 도시의 종착지엔 때때로 삶에 머물지만 끊임없이 추방당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고독'과 '정적'
마차에 탄 비는 밤의 화려한 무도회를 지나쳐 홀로 있는 고독한 이에게 다가갑니다.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그와 함께 술 한 잔을 기울입니다. 밤비는 먼 곳에 있는 이를 데려다 내 곁에 앉혀 줍니다. 셋이 기울이는 술잔에 아침이 담길 때까지.
장마가 시작된다는 오늘, 단어와 문장들이 유리창을 두드립니다. 한 편의 시가 되려나요? 혹 그대 집 앞에 마차를 타고 온 비가 멈추거든 열쇠를 내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몰래 자신이 가두어 놓았던 외로움이 지하실 계단을 오르도록 말입니다. 어딘가에 두고 왔던 친구가 식탁에 마주 앉도록 말입니다.
두고 온 사람
나는 내리는 비 아래
소나기를 피해야겠다고
조금이라도 젖지 않아 보겠다고
애초에 괴롭지 않겠다고
그러니 나가지 않으면 되는 거라고
차라리 묻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러겠다고
전력으로 달릴 때마다
나는 알게 된다
저 날씨 끝에 누군가를 두고 왔다는 것
이제는 데리러 갈 수 없다는 것
-유혜빈-
그럼 두고 왔지만 이제는 데리러 갈 수 없는 이를 그리워하는 현종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카노야마 유키붓 <나가나카가> 그림책 중 양귀비 처형 장면
여름 장마는 별명이 많습니다. 여름비란 의미로 '서우(暑雨)'라고도 하고, 장마의 피해를 들어 '고우(苦雨)'라고도 하고, 줄기차게 내리는 모양을 보고 '적우(積雨)'라고도 하고, 장마의 원인이 음(陰)이 부족해서라는 뜻으로 '음우(蔭雨)'라고도 합니다. 승려의 수련 중 한 가지인 하안거(夏安居)를 우안거(雨安居)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유도 이 기간에 장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특색 있는 별명 중 하나, 매우(梅雨)가 있습니다. 장마가 매실이 노랗게 익는 6월 말에서 7월 초에 내리기 때문이지요. 756년, 당의 현종은 험하기로 유명한 쓰촨 성 잔도(棧道, 험한 벼랑에 선반을 매듯 만든 길)에 올랐습니다. '안사의 난'으로 피난길에 오른 구차한 패왕(敗王)의 모습이었지요. 백성들과 병사들은 이 전란의 원인인 양귀비를 죽이라 맹렬히 요구합니다. 나라의 존망(存亡)을 앞두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진(自盡)을 명했습니다. 양귀비는 목을 맵니다.
어가(御駕)가 사곡(斜穀)에 이르렀을 때 매우(梅雨)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밤비 속에 들리는 애끓는 말방울 소리(夜雨聽鈴腸斷聲)"
현종은 버려 버린 마음을 딛고 나아가는 말방울 소리에 억장이 무너지고, 또랑또랑 빗방울 소리에 양귀비가 그리워집니다. 그 소리를 모아 '우림령곡(雨淋鈴曲)을 짓습니다. 대리석도 녹아내릴 것 같은 현종의 슬픔 때문이었을까요? 열흘을 내리 거센 매우가 내렸다고 합니다.
장마에 관해 말하다 보니 만요슈의 문답이 떠오릅니다. 이 영화에서 비는 탁월한 배우였지요.
영화 <언어의 정원> OST / 유튜버 '프카이'님의 작품입니다.
문학이란, 예술이란 메스 없이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이지요. 섣불리 덮어두었던 상처에 새 살이 차오르도록 합니다. 2013년 개봉했던 산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 OST- 모토히로 하타의 Rain입니다. 장마가 시작할 무렵인 2013년 5월 말부터 2014년 2월의 도쿄가 배경이지요.
비가 내리는 날 아침이면 계절을 품어 울창한 정원의 정자에서 만나는 타카오와 유키노. 둘 다 자신이 있을 장소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학교 고전 선생님인 유키노는 무자비한 모략과 오해로 학교에서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지냅니다. 타카오는 가족이라 하기엔 결속이 부족한, 해체 직전의 관계 속에 홀로 구두 장인을 목표로 노력하는 고등학교 1학년 생입니다. 둘은 비 오는 아침마다 정글 속 '소도'와 같았던 작은 정자에서 초콜릿과 맥주, 소박한 도시락을 나누며 일상을 회복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려고 유키노는 만요슈(일본의 가장 오래된 시 모음집)의 단가를 읊지요.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만요슈 11,2513)"
시간이 흘러 모든 걸 알게 된 맑은 아침, 타카오가 답가를 읊습니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에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만요슈 11,2514)"
너를 통해 '신발 없이도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는 유키노에게 타카오는 '더 걷고 싶어지는 구두'를 만들어 정자 위에 올려놓습니다. 마음의 장마가 걷혔을까요?
차일드 하삼 <5번가 비 오는 날, 1893>
차일드 하삼은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 <5번가 비 오는 날, 1893>을 보실까요. 색과 구도 모두 단순합니다. 화면은 대각선으로 길게 뻗어 길을 걸어가는 마차와 사람을 보여줍니다. 도시는 비에 젖었고 우산을 받쳐든 여인의 치마는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은 신사들, 세련되고 우아한 여인들, 중세의 요괴를 몰아내고 근대의 요정을 불러들이는 쇼윈도와 빗길을 달리는 마차와 트램이 그의 캔버스에서 비를 맞습니다. 미국을 사랑했던 하삼은 특별할 것 없는 이 지루한 일상에 비트를 삽입했습니다. 왈츠의 3/4 박자보다 빠른, 그러나 도시의 시끄러운 소란보다는 늦은 개인의 삶의 속도를 리듬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시처럼 낭송할 수 있습니다.
하삼은 20세기는 '움직이는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팔레트에는 없는 색과 연필로는 묘사하지 못하는 '하루'가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선과 악의 세상이 아니라 일정 분량의 고귀와 비루(鄙陋)를 섞은 개인과 개인이 찬란한 도시에서 함께 내일을 맞을 것이라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세 번의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동메달 하나만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예술세계와 주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그의 작품엔 신비하고 시(詩)적인 시간이 흐릅니다.
신비하고 시(詩)적인 나흘을 보낸 여인과 사진작가의 잊히지 않는 대사가 있지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로버트 킨케이드가 말합니다.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한 번 오는 거요."
로버트가 떠나는 날, 프란체스카는 퍼붓는 소나기를 맞으며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그를 봅니다. 그녀가 차 문 손잡이를 쥐고 어쩔 줄 모르던 그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그녀가 준 목걸이가 그의 트럭 백밀러에서 흔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