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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ul 30. 2024

내일의 뼈

상상농담 50. 바실리 칸딘스키 <노랑 빨강 피랑>

  어젯밤, 일제히 아파트에서 '와아~'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국 남자 양궁의 금메달 소식에 적잖이 흥분했지요. TV를,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뉴스 중 정말 오래간만에 기쁘고 뿌듯한 소식이었습니다. 전쟁, 홍수, 기아, 비리, 청문회까지 그저 참담한 소식이 연이어 들려 뉴스를 멀리한 지 제법 되었네요. 게다가 지금은 휴가기간이잖아요. 브런치에서도 가능한 가볍고 유쾌한 그림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구석, 직무유기를 하는 찜찜함이 있었지요. 그림을 보는 안목을 기르는 방법은 건강해지는 방법과 비슷합니다. 건강해지려면 영양소를 균형 있게 섭취해야 하듯, 감상의 안목을 키우려면 다양한 작품을 만나야 하지요. 특히나 현대의 추상화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들이 제 글을 읽으며 어느 순간 그림이 달리 보이는 경험, 색다른 작품이 눈에 들어오는 사건이 있어야 해요. 오늘은 기분도 상쾌하실 테니 조금 생각하고 상상하는 작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가볍게~ 깃털처럼 사뿐히 샘들 곁으로 날아갑니다.


  그는 추상미술의 선구자입니다. 누구나 보지만 아무나 볼 수는 없는 대상을 영혼의 그래픽으로 바꾸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Dandinsky 1866~1944)의 그림 <노랑. 빨강. 파랑 1925>을 소개합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노랑 빨강 파랑, 1925>


  포근한 햇볕이 담벼락을 데웁니다. 바람도 순합니다. 한낮, 누런 담벼락 밑에서 소꿉놀이가 한창입니다. 동무는 등에 있는 아이를 어르듯, 베개를 포대기로 업고 몸을 흔듭니다. 네모난 판자 위에서 바지락 껍데기는 사발이 되고 커다란 조개껍데기는 냄비가 되었습니다. 푸른 나뭇잎을 짓이겨 만든 풀냄새 풀풀 나는 갖가지 나물반찬에 붉은 벽돌가루는 양념입니다. 갑자기 후드득 나뭇잎 매 맞는 소리가 나고 텁텁한 흙냄새가 피어오릅니다. 다정한 소꿉놀이에 끼지 못해 심술 난 소나기가 길 위에 동그랗고 검은 점을 그리며 쏟아집니다. 우리의 유년은 소리와 냄새와 촉촉함이 있었습니다.  사건보다 뉘앙스가 추억의 알맹이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Dandinsky 1866~1944)의 작품엔 대상이 아닌 음악이 있습니다. 그는 수직과 수평선 안, 모든 것들에게 음악적 상상력으로 음표와 세기를 붙였습니다. 그가 작곡한 그림은 때로 소나타가 되고 때로 교향곡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그 음악을 듣고 춤을 추었으며 또 누군가는 고민하고 사유했습니다.  

    

  그림은 “이것이 무엇이다”는 대상의 형태보다 “발랄하고 율동감 있다”는 밝고 활기찬 느낌이 먼저 옵니다. 화면 가득 색의 향연입니다. 그래서인지 위쪽 가운데의 동그란 원보다 오른쪽의 붉고 푸른 색감과 검은 곡선이 물결처럼 다가옵니다. 깊고 푸른 바다에서 오디세우스를 유혹했던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 아닐까요? 오선지 위의 샵(#)처럼 그림엔 음악이 보입니다.


  칸딘스키는 밝은 파랑은 플루트이고 어두운 파랑은 첼로라고 했습니다. 그의 문법에 따르면 오른쪽에서 연주하는 플루트와 첼로는 부드럽고 은밀하게 화면을 받쳐주고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밝은 노랑은 어떤 소리일까요? 그는 노랑은 고음의 팡파르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네모난 노랑과 갈색 옆에는 마치 소리가 울려 퍼지듯 사선이 사방으로 향해 있습니다. 빨강은 경쾌하고 투명한 바이올린이니 고음의 청아하고 깨끗한 소리가 악보 위를 날아가겠지요? 화면 전체는 고르고 평등하게 각자의 소리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칸딘스키는 그림을 작곡했고 무대 위에서 지휘하고 있습니다. 선과 색이 진동하고 울리며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지요.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던 그는 1895년 바그너의 <로엔그린>이라는 오페라 공연을 통해 무형의 음(音)이 갖는 절대적 공감성에 감동합니다. 또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빛의 유영으로 대상이 흔들린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게 됩니다. 일루져니즘(Illusionism)을 뛰어넘어 추상적 미술의 영역에 눈 뜨게 된 것입니다. 이 체험은 그에게 규율과 원칙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유를 선물했습니다. 그는 뮌헨으로 옮겨 늦깎이 그림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에서 눈부시게 아름답고 황홀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작품을 발견합니다. 그 작품이 거꾸로 놓았던 자신의 그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전율의 순간을 맞이하지요. 그는 기존의 문법을 버립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더하는 것을 버리고 빼기 시작했습니다. 간결해야만 대상의 본질에 닿을 수 있으니까요. 생선의 비늘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어야 비로소 생명의 중추인 뼈가 드러나니까요. 추상(abstract)의 어원은 라틴어 abstractus(제거하다, 떼어버리다)에서 나왔습니다. 칸딘스키가 열었던 현대미술의 큰 흐름인 ‘추상성’은 결국 예술가의 눈으로 비본질적인 것을 떼어버림으로 현재를 넘어 미래를 보게 한 것입니다.  


  휴가기간인 지금, 온 집을 거꾸로 털털 털고 있습니다. 간소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꾸역꾸역 버릴 것이 나옵니다.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공간의 비늘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어 집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 '사랑을 담'고 있는지 살피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시간을 담기 위해 더 덜어내고 더 비워보겠습니다. 칸딘스키의 눈으로 가고 싶은 내일의 뼈를 보겠습니다.


PS : 박규희님의 기타 연주, '페르난드 소르의 연습곡 작품번호 6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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