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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민서 Jan 10. 2021

인간은 왜 부모를 배반하는가

부모는 인간을 그리 가르치지 않았건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은 자연을 파괴함과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인다. 재개발을 위해 동산 하나를 밀어버리는 것에는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다가도,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순간이 찾아오면 너나 할 것 없이 동산으로 향한다. 재활용이니 분리수거니 하는 최소한의 쓰레기 처리 방법을 알고는 있을지언정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서도, 쓰레기나 플라스틱이 산처럼 쌓인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지구를 보호하자’라는 구호를 외쳐댄다. 어디 이뿐인가, 휴가철만 되면 해수욕장을 찾아가 스스로 만들어 낸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지 않으면서도 (심지어 모래사장에 파묻거나 바닷물에 휩쓸려가게 내버려 두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코에 빨대가 박힌 거북이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에너지 효율 등급이 낮아도 가격이 좀 더 저렴한 제품을 고르면서 북극곰의 좁아지는 거주지를 걱정하고, 평소에 본인이 낭비하는 물이나 음식 등에 대한 고려는 배제한 채 아프리카 저 너머 아이들에게 우물과 양식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 얼마나 우습고도 슬픈 현실인가. 






 이런 인간의 역설적인 모습을 마주할 때면 묘한 감정 피어오른다. 물론 나도 인간   명이니, 과거의 어느 순간 이런 부끄러운 행적을 남겼을 테지. 밀려오는 환멸감을 애써 뒤로한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인간의 근원은 어디이며 종착지는 어디인가하는 의문이 남는다. 얼마 전에 지구로부터 몇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지구와 성질, 크기가 비슷한 행성을 발견했다며, 수백  후에는 인간들이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가능성도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깽판은  쳐놨지만 수습하기는 귀찮으니 그냥 버리겠다'라는 말과 다를  무엇인가. 책임을 지지 못할 거라면 시작도 말았어야지. 차라리 ‘ 어떤 허구의 체계 존재하지 않았을 수렵 사회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며 나보다 물리적으로 약한 것을 잡고 강한 것을 피해 도망치며,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절로 돌아갈  있다 하더라도, 획기적인 문명의 맛을  지금의 나는  순간을 무지하게 그리워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자연과 지구는 어떤 존재였고 어떤 존재이며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자연’과 ‘환경’은 너무나도 광활한 존재여서 한 번 고민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환경문제’만 고려해보더라도 그 범주가 물, 쓰레기, 지구온난화, 대기, 갯벌, 해양, 바이러스, 미세먼지, 멸종위기종 등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며 이를 모두 해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이런 다양한 범주들은 어찌 보면 하나로 연결되기도 해서, (가령 땅에 파묻힌 화학물질이 지하수에 녹아들어 변종 생물이 생긴다거나,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든다거나, 분해되면서 나오는 나쁜 성분들이 지구온난화를 가속한다거나, 화학물질을 머금은 열매를 인간이 먹고 새로운 병이 생긴다거나 하는 등)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러니 지구의 미물에 불과한 한 인간은 그저 골방에 처박혀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건 지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자연을 누구보다 우습게 다루면서도 자연을 예찬하는 인간들. 그들이 ‘진정한 자연의 섭리’를 인지한다면 환경문제도, 그 어떠한 차별도 없어지지 않을까. 자연의 섭리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섭리,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을 의미한다. 자연은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땀을 흘린 만큼 열매를 맺게 해주고, 돌아다닌 만큼 수확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내가 향하는 곳에 원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한 것들에 인간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이요, 이로부터 우러나는 안정감이나 행복감 따위의 여러 감정까지 수확할 수 있다. 게다가 새벽녘의 일출이나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나 내리쬐는 햇빛 따위의 아름다운 광경은 덤으로 따라오니 자연은 그야말로 한 그루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같달까.






 다시 지금의 인간, 그러니까 ‘자연에 적응하고 자연을 이용하기 시작한 인간’을 살펴보자. 우리는 그저 태어난 곳의 지리적 위치, 환경, 특성에 맞춰 생활방식을 달리했을 뿐이고 햇빛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낮과 밤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등에 따라 자연스럽게 모습을 바꾸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간은 자연에 맞춰 진화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지금의 여러 문화와 유색인종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사고방식을 가진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 그러니 우리 인간의 다양성은 자연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셈이다.






 자연은 그 무엇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자연에서 비롯된 인간이 감히 차별을 범하는가? 그것이 사상이든, 사물이든, 지역이든, 생명체든 더 나아가 같은 인간이든 간에 말이다. 자연은 인간을 그리 가르치지 않았건만 인간은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기준으로 삼아 온갖 차별적 행위를 일삼고 있다. 최근 대두된 (이 글을 썼을 당시에는 최근이었다) 미국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만 봐도 참 씁쓸하기 그지없다. 피부색이 어떻게 차별의 기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비단 미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에 상대적으로 흑인의 비율이 낮아서 ‘우리는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라는 착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직도 대다수의 한국인은 동남아 계열의 사람이나 조금이라도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들을 ‘베트콩’이라 부르거나 중국인들을 ‘짱께’라고 부른다. 막상 외국에서 ‘니하오’ 소리 한 번 들으면 기분 나빠하는 한국인이 대다수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 문제의 본질은 ‘흑인’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아닌 ‘인간’에 대한 차별의 문제다. 세상의 모든 색이 피부색이 될 수 있는데 이를 차별의 기준으로 삼은 것 자체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지.






 나는 종교가 없고, 추후 종교를 가질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Amazing Grace를 부르고 싶다. 인종 대통합을 위해 본인이 흑인임을 강조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오바마 전 대통령이 찰스터 희생자 추모식에서 불렀던, 흑인 노예 선상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이 자신의 죄악을 참회하며 작사했다는 바로 그 노래를. 과연 인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이 노래를 단순히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자연의 섭리로 들을 수 있을 테다. 모두가 동등하고 평등했던, 자연 그 본연의 모습으로.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내게는 중요치 않다. 그저, 놀라운 은혜는 자연의 섭리라는 진리뿐.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6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 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 브런치에 올리는 모든 이미지는 직접 구매하여 라이선스를 부여받은 이미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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