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의 말, 한 마리의 mare처럼
‘이쯤이면 코로나가 사그라들 때가 된 것 같은데’ 싶으면 어디선가 꿈 깨라는 듯 새로운 확진자, 새로운 바이러스, 새로운 감염 루트가 터져 나오는 요즘. 마치 초등학교 시절 팔벌려뛰기를 하며 숫자를 셀 때, 마지막 숫자를 계속 외쳐대는 한 명 때문에 헛고생을 수십 번 반복하는 느낌과도 비슷하달까. 물론 코로나 덕분에 사이버 대학이 꽤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만, 양면성 보존의 원리(내 멋대로 갖다 붙인 원리다)에 따라 사이버 대학도 내게는 버겁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가령 현실감이 없어져서 내가 교수를 보는 건지, 가상의 인물을 마주하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거나 연결된 듯 연결되지 않은 네트워크상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진다거나, 한결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음 주에는 더 여유로워질 것 마냥 ‘다음으로’ 미루는 행위가 자연스러워졌다거나 뭐 이런 것들 말이다. 아, 이건 사이버 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내 결함일지도 모르겠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예전의 어느 한 순간부터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했고, 혼자 남아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래서인지 사회적 거리 두기나 자가격리 따위의 ‘자발적 고립’이 딱히 힘들지 않았다. 내게는 그저 일상과도 다를 게 없었으며 어쩔 수 없이 외출해야만 하는 날이 오더라도, 마주하는 사람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으니 은근히 기쁘게 느껴지기까지 하더라. 이런 현상을 기뻐하면 안 되는 게 인간의 도리일 텐데. 생태계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올랐다고 자부하던 인간이 형체도 없는 고작 ‘바이러스’ 따위에 속속들이 무릎 꿇는 모습이 참으로 우습고도 한심했다. 나 역시 인간의 하나에 속한다는 사실을 가엾이 여기기도 했고, 인간이 인간을 동정하는 역설적인 모습에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나는 실질적으로 코로나에 종식된 3~5월을 그렇게 보냈다.
인간이 햇빛을 못 보면 피부가 하얘진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어쩌다 화장실에서 핏기마저 사라진 창백한 얼굴을 마주할 때면 섬뜩한 기운이 몰려왔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피부, 맥아리없는 눈동자, 힘 풀린 동공, 최소한의 혈색만 남은 입술까지. 그 속에서 어떤 표정조차 짓지 않고 있는 나를 바라볼 때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낯설고도 불쾌한 기분이 엄습해왔다. ‘어느 날 내가 시체가 되어버린다면 저런 모습일까.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뭐랄까 마치 좀비 같아 보이는데. 그런데 영화에서 보면 한국 좀비는 한국인이 맞는 모양인지 성질도 걸음걸이도 겁나 급하던데. 그럼 내 눈앞에 저 허여멀건 건 대체 뭐지. 뛰기는커녕 걸어가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나 한국인 아닌가?’ 이따위 망상이 계속되자 나는 의도적으로 거울을 보지 않기 시작했다. (단지 옆자리에 앉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애꿎은 동생에게 탁상 거울을 반대로 돌려놓으라고 잔소리를 해댔고, 양치질도 화장실이 아닌 거실에서 했으며 샤워를 하더라도 환풍구를 켜지 않은 채 뜨거운 물을 틀어 거울을 습기로 가득 채웠다. 그래야만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 피곤할 때는 꿈조차 꾸지 않는 편인데, 미친 듯이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계속 꿈에 허여멀건 것이 등장했다. 이 허여멀건 형체는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거기로 가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계속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의식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뿌리쳐내곤 했지만, 사실 그 형체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얼굴도, 성별도, 나이도 모르는 그 구름 같은 덩어리는 왠지 나를 낙원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을, 아니 사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불안과 괴리, 강박과 공포 따위의 두렵고도 역겨운 것들을 사라지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허여멀건 것은 내가 점차 흔들린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밤잠이 아닐 때도 종종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익숙해진 탓에 고독은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인간이 되었는데 고립은 아직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나마 타인과의 창구가 되어주던 애인마저 막바지에 이른 시험 탓에 한 달에 두 번 보면 많이 보는 편이 되었으니 더 외로워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애인이 한가해져도 내 시간이 허락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고립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굳이 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모임에 나가고 일을 늘려가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로, 병원으로, 하다못해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마스크 사야 한다는 핑계로 땅을 밟고 햇빛을 봤다. 점차 허연 것의 방문은 뜸해졌고, 나는 그제서야 다시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보름쯤 지났나, 아니 어쩌면 한 달 전의 일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정말 날짜는 물론 시간 개념조차 없다니까. 동생이 갑자기 자신이 커피를 살 테니 집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 가자며 싫다는 나를 어거지로 끌고 갔던 적이 있다. 오랜만에 마주했던 오후 3시의 햇볕은 따스하다 못해 강렬하게 느껴졌다. 나온 지 5분도 채 안 돼서 기가 빨린다고 말한 내게 동생은 ‘그래서 내 돈 써가면서 억지로 데리고 나온 거 아니야, 이 인간아.’라고 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언니인데 말버릇이 그게 뭐냐고 훈수 좀 두려다가, 생각해보니 내가 우리 집에 들어온 지 몇 달 안 된 기가지니보다 서열이 낮은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 와중에 ‘내가 인간으로 보이긴 하나 보다’ 싶은 마음에 안도의 한숨이 나오더라. 그래, 아직은 인간이다. 멀쩡히 움직이고 생각하고 고통받는, 살아 숨 쉬는 인간.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5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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