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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민서 Dec 28. 2020

수취인 없음

그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는 편지


 간혹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르는 날이 있습니다. 서랍 속 고이 간직해오던 까슬한 질감의 너무 얄팍하지도, 그렇다고 두툼하지도 않은 순백의 편지지를 꺼내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만년필을 집어 들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고 싶은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날. 어떻게 써내려야 내 마음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세상의 온갖 단어들을 꺼내어 비교해보는 그런 날 말이죠.






 인터넷이 생겨나고, 전화나 문자는 물론 실시간 대화까지 가능해진 시대에 더 이상 ‘편지’는 예전만큼의 위력을 과시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하기야, 원한다면 기업이나 단체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를 전자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게 된 시대에 편지가 웬 말입니까. 훈련소처럼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채, 오로지 소통의 창구가 ‘편지’밖에 없는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그마저도 인터넷 편지가 가능한 시대이니 ‘편지’의 존재 여부는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의 의무적인 숙제나 여러 기념일 따위에 국한될 수밖에 없게 된 셈입니다.






 그럼에도 편지만큼 마음을 들뜨게 하는 존재는 또 없을 겁니다. ‘이는 오로지 너를 위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 편지 봉투에 뚜렷하게 적혀있는 내 이름 석 자. 편지지의 모양새에서 짐작할 수 있는 상대방의 취향. 조금은 서투를지 몰라도 세상에 단 하나뿐일 아름답기 그지없는 글씨체. 비록 화려한 미사여구가 곁들여지지 않아도 투박한 진심만은 그대로 느껴지는 내용. 어떻게 마무리를 맺을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마지막 문장까지. 이 세상의 순수한 마음만을 담아놓은 것이 바로 편지일 테죠. 그것이 사랑, 감사, 우정 따위의 감정을 담고 있든 혹은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이든 말입니다.






 흔히들 그러더군요, 인생에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순간의 우리를 담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그 순간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그땐 그랬었지’ 따위의 씁쓸하면서도 아련한, 그런 얄팍한 감정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죠. 오히려 남는 건 내 손으로 눌러쓴 편지 한 장일 텝니다. 그 편지가 누구 앞으로 향하든 자신을 고스란히 기록할 수 있으니까요. 취향껏 고른 종이에 순간의 감정, 생각, 마음 따위를 자신만의 글씨체로 담아내는 것. 이미지로 보여주지는 않아도 머릿속으로 직접 그려보게 만드는, 그야말로 그 순간, 그 사람의 본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오늘은 순간의 저를 기록하기 위해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시험 기간이어서 그런지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절대’라는 표현부터 이런 마음이 어느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뭐 믿음이나 짐작 역시 개인의 자유니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종이를 찾아 펜을 집어 들었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손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니. 어떻게, 좀 살아갈 만한 세상이니. 넌 어떤 것을 좋아하고 사랑했니. 어떤 것이 널 무뎌지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들었니. 네가 정해놓은 가치관이나 윤리 따위에 맞춰 잘 살아왔고, 살아왔으며, 살아갈 예정이니. 한때 네가 진리라고 믿던 것이 정말 진실한 것이었니. 너와 내가 어떤 대상에 내린 정의가 같다고 자부할 수 있니. 그 정의가 다르다면 너와 나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니. 네가 추구했던 이상들이 연막탄 아래 몸을 감춘 더러운 현실은 아니었니. 아니면, 더러운 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알고 보니 꽤 이상적인 것들이지는 않았니. 지워버리고 싶은 현실이나 기억이 있니.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지워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니. 지금의 네게는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니. 예전만큼 정의나 소신을 좇아갈 자신이 있니. 점점 희미해져 가는 소중한 것들을 잊지 않을 자신이 있니. 사실 나는 모르겠어.  






 그냥 뱉어낸, 아니 토해낸 것 같은 말들을 이어붙인 저 편지는 과연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일까요. 펜을 잡은 것은 분명 저이지만, 꼭 저 혼자만이 쓴 편지는 아닌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그럼 수취인은 누구냐고요? 애초에 이 편지의 명확한 수취인은 없습니다. 이 편지를 실제로 집어 들고 읽을 수 있을 사람은 아마도, 언젠가 구더기와 함께 나뒹굴고 있을 제 육신을 지켜볼 사람 혹은 영혼이겠죠. 아니면 흔한 클리셰 중 하나인 ‘해변으로 떠내려온 빈 병 속의 편지’를 받아 볼 저를 모르는 누군가가 읽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이 편지가 어떻게 쓰여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든 그 의미는 변하지 않을 텝니다. 물론 이 의미에 대한 정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나름 정성스럽게 눌러쓴 편지는 다시 어딘가에 봉인해둡니다. 저조차도 잊고 싶으니, 대충 ‘제가 지닌 책이나 공책 중 하나에 끼워 넣어두었다’고만 명시해두겠습니다. 훗날 제가 이 사실을 까먹고 책을 잃어버린다거나, 공책을 버린다거나, 누군가가 제 책을 열어보는 순간 이 편지는 다시 빛을 보고 누군가에게 읽힐 수 있겠죠. 그 누군가의 반응이 꽤 궁금하긴 합니다만, 혹여나 저도 모르게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될까 봐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는 건 제 자유지만, 타인에게 읽히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한 자 한 자 눌러쓴 그 편지는 어딘가로 사라졌을까요.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5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44. 5월 20일(수)
오늘만큼은 하라체가 아닌 하십시오체와 해요체를 혼용해봤습니다.
그냥 오늘의 글은 그렇게 쓰고 싶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44번째 작성하는 원고입니다. 
오늘따라 유독 컨디션이 안 좋은 게 ‘4’라는 숫자가 두 번이나 반복된 탓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4라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헛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걸 보니, 오늘은 꼭 일찍 자러 가야겠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시길 바랄게요.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공간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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