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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 May 10. 2020

나는 순진한 초보 부장교사였다

사립학교 정교사로 살아남기 1


퇴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의 행복과 상대의 불행이 부딪힐 때 어느 쪽을 택하느냐를 놓고 일 년 내내 고민했다. 상대를 불행에 빠뜨리려면 나의 행복은 포기해야 하는 이 게임에서 나는 결국 상대를 불행하게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내가 여기서 나가 좋아할 사람들이 여럿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즐거운 기분을 느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당장이라도 이 곳에서 걸어 나가는 것이 정답임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지만 동시에 내가 나간 후 이들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면 오히려 오랫동안 다니고 싶어 진다.


게다가 지금 퇴직을 해버리면 이들은 남은이들에게 나를 모함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앞 뒤가 꽉 막힌 오만한 사람으로 이미지를 메이킹당할 것이다.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현재 내가 근무 중임에도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사실 확인 없이 무책임한 '카더라'식의 험담은 조직 내에서 관리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관리자의 입에서 시작된 이미지는 너무도 손쉽게 조직 내에 퍼져나간다.


그간 별 감정 없이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던 동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진 것을 보면 나에 대해 어떤 소리를 들었을지 알 것 같다. 




그렇대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관리자를 흉보던 사이였던 사람들이 언제부터 관리자의 말을 신뢰했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면 뒷담화는 누구입에서 시작되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험담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게 만드는' 속성에 의해 변명할 기회도 없이 한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2년이 되도록 직장 내 성희롱 사안을 처리하지 못한 무능한 관리자들은 결국 적극적으로 움직인 몇몇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 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2년 동안 그들은 '중립'이라는 말 뒤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는 순진한 초보 부장교사였다.


관리자는 나보다 우월한 부분이 있으므로 그 자리에 앉았겠지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안이 터지자마자 이들을 믿고 규정을 찾아서 필요한 조치를 취했고 회의를 열었으며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항상 마지막 순간에 움직여야 하는 것은 이들이었음에도 이상하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들이 나보다 신중해서라고 생각하며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이들이 처음부터 해결할 의향이 없었음을 알아챘다. 참 눈치도 없었다.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법인에 많은 도움을 주는 입장이라 학교에서도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음을 실컷 일을 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 이런 사실은 함구한 채 관리자들은 마치 내가 감정적으로 대응을 한 것인 양 뉘앙스를 풍겼다.


이들은 가해자 측에서 불어올 후폭풍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만 내 직장에 정의가 살아 있는 줄 착각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꼴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가해자는 나를 원수 취급했다.


주관적인 판단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학교는 교육청,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등 외부기관에서도 가해 사실이 인정된다는 객관적인 통보를 받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런 대응이 가능했던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사립학교의 인사권은 법인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국가기관에서 객관적인 지침을 내려줘도 이것을 행사할지 말지는 법인에 달렸다. 교육청에서 성희롱 가해자를 직위해제할 것을 학교에 권고했지만 법인은 이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최종적으로 인사를 결정하는 권한이 법인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기업에서 왜 인사부가 막강하다고들 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권력의 시작과 끝은 인사권이었다. 직원의 채용, 퇴직, 징계, 배치 등 개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인사권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립학교의 법인은 모든 권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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