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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 Jul 15. 2020

미투, 신고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사립학교 정교사로 살아남기 8

747일


직장 내 성희롱 사안이 발생 한 날로부터 1심 재판 결과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에도 직장 내 성희롱을 신고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여겨봐야 할 숫자다.


재판까지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글쎄. 그렇게 안일한 생각으로 신고를 하려 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하겠다. 누군가의 잘못을 국가기관으로부터 인증받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인이라면 직장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시작해야 한다. 하물며 재판쯤이야...




나는 재판의 당사자가 아니었는데도 멘탈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나중에는 이꼴저꼴 보기 싫다는 마음만 가득해져서 그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가 당사자였다면 나는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녀린 피해자는 나와 달랐다.



그녀는 끈기가 있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에겐 쉼 없는 협박과 회유가 이어졌다. 물론 그때마다 번번이 울고 힘들어했지만 그녀는 고스란히 그 고통을 느꼈고 그것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그것을 동력 삼아 전진했다. 조금씩이지만 이렇게 747일을 걸어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느긋한 성격도 한몫했던 것 같다. 업무상 부당한 지시를 해도 일단은 듣는 것이 그녀의 대처방식이었다. 물론 처음엔 업무에 대해 잘 모르니 대꾸할 말도 없었겠지만 그녀는 할 말이 있어도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이런 허용적인 태도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대방은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곧 상대의 말실수로 이어지기도 했다.


역시 말이 많은 것은 장점보다는 단점에 가깝다.





성격이 급한 나로서는 이런 그녀를 보면서 배울 점이 많았다. 한 때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불같은 성격'을 자랑스레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상대에게 약점을 보이는 꼴이었다. 세상일은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한 일이 대부분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절대 내가 가진 패를 까서는 안된다. 포커페이스가 도박판에서만 유용한 것이 아님을 나는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이도 어리고 직장 내 위치도 불안한 초보 직장인이었지만 그녀는 뚝심이 있었다. 그것이 결국 이 재판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공을 다른 데로 돌렸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 두면 지금까지 자기를 도와주었던 여러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가해자와 관리자들이 뛸 듯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죽더라도 여기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고백을 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나 같으면
진작에 그만두었을 거야.



나의 '불같은' 성격은 나를 혼자 타버리게 하고 말았을 것이다. 성격 급한 내가 2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리고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가능했다. 나와 그녀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혼자 미쳐 날뛰다가 제풀에 지쳐 멋있게(?) 이곳을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팀워크는 훌륭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의 입장이었으므로 뜨거움보다는 냉정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고 뜨거움은 잠시 미뤄두어야만 했다.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를 쓰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서류의 힘을 믿었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싸움은 말과 글로 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증거를 모으고 기억을 기록했다. 이런 활동은 나를 점점 더 차갑게 만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대책 없이 날뛰던 과거의 나보다 훨씬 똑똑해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와 내가 대책 없이 날뛰어도 좋은 날이다.


747일 만에 모처럼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나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그동안 이 길을 함께 걸었던 동료들과 축하를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내일 당장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


나는 오늘의 뜨거움을 만끽하기 전에 우리가 했던 일들을 돌아보았다. 성공 요인은 두 가지로 요약되었다.


끈기와 팀워크



성희롱이든 무엇이든 누군가를 상대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면 이 두 가지를 꼭 챙겨서 길을 떠나야 할 것이다.



특히 조직 내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 없이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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