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인지 끈질김인지 의지인지 집착인지
인도네시아어(인니어)를 한다. 14년 전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나이 30에 인도네시아를 갔다.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먹고사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따놔 두었던 컴퓨터 관련 자격증으로 단원이 됐다.
그렇게 단원생활 2년을 했는데, 너무 아까웠다. 아마 빠르다 못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돌아가는 한국사회에서 대부분 나의 선택을 정신 나가거나, 현실도피로 보거나, 무능력으로 봤던 것에 대한 반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원도 자퇴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의 봉사단원이라니 당연히 그렇게 보였을 법도 했다)
그게 집착이든, 의지이든 그렇게 인니어를 놓지 않았다. 방법을 찾다가 사이버외대 인니어과를 들어갔다. 매일이 일에 치여있던 터라 일을 또 저지른다는 것에 남편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은 터지면 수습하게 돼 있다’가 내 지론인지라 무턱대고 등록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났을까. (이런..) 임신을 했다. 임신은 축복이지만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 감정의 연속이다. 하던 일은 어쩌며, 지부장은 누구에게 넘겨야 하며, 계획했던 일들은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함과 아이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을 다잡던 중..
더 큰 나의 고민은 인니어는 어떻게 하지? 였다.
휴학해야 하나.. 휴학하면 다시 복학은 어쩌지? 그러다 국가장학금을 받았다. 휴학하지 말라는 뜻이 구나 싶은 제멋대로의 해석으로 조리원에서 하라는 조리는 뒷전인 채 인니어 수업을 들었다.
어떤 일이든 예상대로 되지 않고, 예상보다 힘든 법이다.
그렇게 졸업했다. 빛나는 나의 졸업장이었다. 더 늦기 전에 이렇게 사는 건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서 이번엔 코이카 코디네이터에 지원했다. 당연히 인도네시아에 지웠했는데, 태국이 됐다.
어떤 일이든 예상대로 되지 않고, 예상보다 힘든 법이다.
다시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라니… 이번엔 가족까지 함께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