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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선 Apr 02. 2024

우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2024년 피스모모 진행자 상반기 공부모임 글쓰기 ①

요즘 개인적으로 짝꿍과 계속 갈등을 빚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평화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바꾸고, 그 결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순간,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상당히 제한되지요. 기후위기, 전쟁과 같은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잖아요.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야 하는데,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그러게 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생각의 변화가 필수적이고, 이 생각의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이 사용됩니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략이 바로 교육이고, 저는 여기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그와 비슷하게 많은 사람들이 너무 이상적이다, 비현실적이다라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섣부른 판단은 지양해야겠지만, 저는 그 배경에 무기력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교육제도 (주류 교육 패러다임) 내에서 우리가 배웠던 것은, 혹은 배우도록 기획되었던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면 우리는 제도를 넘어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개체로 상정되지는 않았죠. 오히려 제도와 규범, 규칙에 순응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낙오되는 것이 당연하게 만드는 교육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을 때 그 힘에 대해서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했나요? 당연히 저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교육 이론의 틀을 잡아놓은 학자들이 진작 존재했습니다. 비판적 페다고지(교수학)에서는 어떻게 하면 교육을 통해서 사회변혁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왔지요. 피스모모에서 진행하는 평화교육을 위한 진행자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상반기 공부모임이 시작되며 첫 번째 텍스트로 『비판적 페다고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조시화, 37-152p를 읽으며 그 역사와 이론적 배경을 훑어볼 수 있었습니다. 


위 책에서 비판적 페다고지의 구원자라고 묘사된 파울로 프레이리는 비판적 페다고지를 언급할 때면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학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류 교육 패러다임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지만 결정론적인 신마르크스주의 교육학자들과 달리, '해방'과 '가능성의 언어'를 제시한 점에서 주목받습니다. 이미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제 짝꿍은 신마르크스주의 관점과 비슷한 면이 있겠네요. 저는 저 자신도 여러 차례 변곡점을 겪은 사람으로서, 쉽지는 않아도 사람의 변화·해방의 가능성을 믿고 싶거든요. 환경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 난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어요?


프레이리의 교육 원리는 개인 또는 개인의식의 전환이 그 핵심이다. 이는 억압/현실의 운명적 수용으로부터 현실을 더 좋은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적 의식/희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전환은 가능하다. 프레이리에 따르면, 그 이유란 더욱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 역사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Freire 1970/1997. 달리 말하면 프레이리에게는 희망과 가능성의 토대는 "인간화"되려는 인간의 운명/본성에 있다. 이런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필연적 소명 때문에 인간은 한번 자각을 하게 되면, 완전한 인간화를 제압하는 억압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프레이리는 주장하였다.

『비판적 페다고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조시화, -51p


얼마 전 3월에 진행된 평화교육진행자되기 입문과정에서 피스모모의 다른 활동가 뭉치와도 나누었던 이야기인데요. 저는 대학생 때 대화에서 툭하면 '네가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래'라며 남자들한테 무시받는 것이 너무 지겹고 짜증 나서 ROTC에서 여군을 받기 시작하자마자 2기로 지원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알면서도 나는 다른 여자애들과는 다르다는 여성혐오적인 사고방식도 굉장히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이후 인문학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소모임에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당시 저 때문에 얼결에 끌려왔던 아는 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제 누가 답을 내려주지도 않는 것들로 인해서 고민을 끝없이 하게 생겼다, 한번 알게 된 이상 몰랐던 때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나눈 저와 언니의 대화 속 언어는 투박했지만, 이 정리된 문장을 읽고 나니 프레이리가 말하는 "인간화"와 억압에 대한 것을 어렴풋이 자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억압을 자각하고 나니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뻗어나가 시민사회단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정치에서 평화학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 순서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교육을 통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 더 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도대체 비판적 페다고지에서 어떤 교육을 통해 사람과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는 걸까요?


이 책에서는 비판적 페다고지의 대안적 프로젝트로 총 네 가지의 프로젝트를 정리합니다. 1) 경험의 프로젝트, 2) 다자성과  포함/포용의 프로젝트, 3) 반위계적 민족주의의 프로젝트,  4) 개인적 자각의 프로젝트가 그것입니다. 


경험의 프로젝트의 목표는 학습자의 살아있는 "경험"에 기반을 둔 교육과 지식을 형성하여 지식/앎의 억압적 문화 틀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자성과 포함/포용의 프로젝트를 통해서는 비특권층이고, 억압되고, 주변화된 혹은 정복된 사람들을 위한 평등한 기회와 평등한 권력을 보장해 주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아 "경계선을 넘기"위해 애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위계적 민주주의의 프로젝트에서는 "과정의 정치"의 원리로 합의, 대화, 다원주의, 차이의 존중등이 제시되었고, 푸코의 권력 이론을 가지고 와서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의 대상을 국가/제도/위계적 권력구조에서 일상의 삶과 경험으로 가져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 자각의 프로젝트를 통해 억압과 지배의 형태를 자각하도록 하여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했는데요. 


개인적 자각의 프로젝트가 가진 하나의 문제는 "허위의식 명제"이고, 그리고 이 명제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판적 교수학에 꽤 만연해 있다. (중략) 허위의식의 명제를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환상에 사로잡혀 있고, 그들이 "진실"에 노출되면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략) 그람시에 따르면, 사람들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은 자신들의 "진정한" 이익을 보지 못하는 것 - 허위의식- 때문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헤게모니를 통해, 그리고 양보- 예를 들면, 더 높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시간 같은-을 통해 피지배 계급으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주의-서구사회에 만연한 의식-를 "자각된 허위의식"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잘못된 가치를 가지고 살고 있고,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이런 자신의 허위를 알고 있다. 그는 이런 만연한 냉소주의에는 이데올로기 비판이 무력하다고 주장한다. (중략) "사람들이 자신들의 허위성/거짓을 이미 알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어쩌면 의식화된 사람의 의식이 사실은 그들이 의식화하려는 사람들의 의식보다 더 순진할지도 모른다.
139p-141p

앞서서 읽었던 프레이리의 "인간화"를 위한 자각과 상충되는 내용 같기도 합니다. 양쪽 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고민이 됩니다. 저는 제가 앎으로 억압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여전히 사람들을 논리로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강한데요.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억압에서 벗어나려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허위의식 명제 함정에 단단히 빠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옳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좋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한다는 말-그러니 너무 설득하려 하지는 마라-을 최근 피스모모의 아영에게서 듣기도 했어요. 


실제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제 이야기를 듣고 '몰랐어요, 알게 되어서 고맙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보다는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그걸 진심으로 믿는다니 순진하네요.'와 같은 반응이 훨씬 많습니다. 이 책에서 명쾌하게 '허위의식 명제 함정에 빠지셨군요.'라고 정리해 준 덕분에 앞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스스로가 상대를 그렇게 보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 점검해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제가 교육적/정치적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떤 방향일까요?


옳은 프로젝트로 접근을 하기보다는 다정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접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피스모모에서 이미 하고 있듯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포용받고, 포용하고, 위계적이지 않은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것까지는 그게 가능하지요. 그런데 개인적 자각 차원에 들어서는 것부터는 그런데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아요. 개인적 자각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 개인적 자각을 어떻게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나갈 것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빈 공간이 남아있습니다.


저는 비판적 페다고지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읽어본 것이 이번이 거의 처음인데요. 개인적 자각의 프로젝트 부분에 대한 의문이 남아 앞으로 공부를 할 때 계속 주의 깊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서두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저는 결정론적으로 생각하는 짝꿍과 세계관이 달라서 대화를 나눌 때 시간을 꽤 많이 들이고 있는데요. 이 책에서 비판적 페다고지 교육자들 중 많은 사람이 '허위의식 명제'에 빠져있다고 문제를 지적한 것처럼 저 역시도 그랬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사회의 억압과 지배의 형태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이미 그 지점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거기서 '개인의 주체성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로 들어갔을 때 억압과 지배에 대한 자각이 주체성에 대한 의식화로 곧바로 연결되지는 못하는 뿌리 깊은 무력감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 자각에 앞서 경험의 프로젝트 부분에서 무력감에 대한 것을 깊게 작업해야 했던 것이죠. 개인의 대화에서도 그렇겠지만, 교육 현장에서도 개인의 경험에 녹아있는 무력감이라는 감정과 경험을 다루고, 권한 부여하기가 정말 기반이 탄탄하게 되어있어야 그다음 단계들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네 가지의 프로젝트가 한꺼번에 제시되어 있는 것은 그중에 하나를 취사 선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네 가지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라는 의미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을 고르자면 역시 감정을 담당하고 있는 경험의 프로젝트 부분일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감정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변화를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무력감을 잘 다루어서 어찌어찌 주체성을 회복한 개인이, 억압에 대해 깨닫게 된다면 의식화까지 연결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의식화된 개인이 사회적 변혁까지 이어지는 것은 또 어떨까요?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지 묻는 질문을 받게 될 때마다 저는 반대로 묻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것이 바뀐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 저도 그다지 자신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듭니다. 이 또한 어찌 보면 제 경험 안에 녹아있는 무력감-정치적 효능감-과 연결되어 있겠지요.


일본인 활동가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한국의 촛불집회와 정권탄핵을 부러워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이웃나라에서는 엄두도 못 낼 커다란 일을 여러 차례 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바뀌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더더욱 무력감에 젖어드는 나날이 반복되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나는 지금 마라톤을 뛰고 있는 거다, 생각하며 조금씩 힘내 봐야지요. 비판적 페다고지에 대해 읽다 보니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을 대하는 자세, 활동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해보게 되는 텍스트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교육 진행자로서만이 아니라, 평화활동가로서의 제 자신의 축이 많이 흔들리는 요즘인데 공부모임을 하면서 생각을 좀 다잡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주변성이 존재한다면, 그들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개개의 주변성의 의미가 맥락적이라고 한다면, 어떤 주변성이 다른 주변성보다 더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모든 주변성들은 다 똑같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 또한 맥락에 따라 다른가? 모든 게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리는 상대주의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만약 한 이론이 할 수 있는 게 "맥락에 따라 다르다"일 뿐이라면, 그 이론은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동안 이런 질문들이 논의되었다. -57p

마지막으로, 이건 곁가지인데요. 텍스트를 읽으면서 평화학과 여러 운동, 비판적 페다고지가 만날 수밖에 없는 지점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위 박스는 탈근대주의의 "주변성"에 대한 언급과 함께 제시된 질문들입니다. 최근 들어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료 활동가들과 이야기했던 지점들과 맞닿아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소수자로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그 특성에 매몰되어 다른 소수자의 주변성을 '중요하지 않다'라고 판단하는 순간, 도대체 어떻게 연대하고 함께 활동해야 나가야 할지 고민이 되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활동을 하다 보면 주변성에 '중요도'를 판단하는 기준조차 기존 권력이 부여하던 '중요도'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느낄 때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재일조선인문제를 다루기 위해 여성인권 문제는 뒤로 미루게 된다던가 하는 순간들이요. 상대주의에 빠지고 싶지는 않지만, 각 주변성들에 어떤 위치와 권위를 부여할 수 있을지 그동안 이루어졌던 논의들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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