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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선 Jun 09. 2024

우리들의 기억에도 몸통이 있다면

4.16 사회적 기억 아카데미 14기 1회 차를 마치며

기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오늘 이 질문에 참여자들이 대답한 것 중 두 가지 키워드가 내 가슴에 콕 와서 박혔다. 기억에 남기겠다는 '욕심', 그리고 '처절함'. '처절함'이라는 키워드를 말씀해 주신 분은 돌아가신 어머님과의 마지막을 하나씩 기록으로 남기셨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렇게 준비된 마음으로 맞이해도 힘든 이별을, 영문도 모른 채 당하면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냐고. 자기는 그런 마음으로 참사를 당하신 분들을 볼 때마다 연대하신다고.


나는 기억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정보는 그저 흘러간다. 우리의 몸에, 머리에 남는 것들은 어떤 감정이 담긴 것들이다. 좋았던 것, 싫었던 것, 슬펐던 것, 행복했던 것, 아팠던 것, 짜릿했던 것... 그렇다고 감정과 비례해서 선명하게 남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어떤 강렬한 감정은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해서 외면당하고, 그래서 흐릿한 기억으로 남는 것들이 있다.


오늘의 4.16 사회적 기억 아카데미 활동에서 4.16에 대한 그 흐릿한 기억을 되살리는 동안 뭐 떠오르는 것이 진짜 별로 없었다. 내 기억에 확신도 없었다. 내가 그때 휴학 중이었는데. 나 그날 밖에서 밥을 먹고 있었나? 아닌가? 확실한 건 그날 나는 실시간으로 뉴스를 보지 않았다는 것, 친구들에게 뉴스를 전해 듣고 인터넷 기사로 팔로업을 했었다는 것 정도. 이후 우리들이 그 건에 대해서 그다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나. 이야기를 나눠도 제한적이었다는 것. 당시 사범대에 재학 중이었던 내 주변 친구들은 다 침울해했지만 이야기에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자기들이 같은 곳에 있었어도, 혹시나 밖에 나왔다가도 다시 들어갔을 거라고. 우린 저 희생자 명단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되었을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몸을 좀 떨었다. 우리가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수준'은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과 친구들은 그 일이 있기 1년 반쯤 전에 친구(사회적으론 내게 선배였지만 나는 친구라고 생각했다)를 하나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때도 우리는 슬픔을 드러내고 서로 돌보는 일에 허용적이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쟤는 (학번상) 그렇게 가깝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렇게 친한 척을 하지? 식장에 계속 있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집에 와서 혼자서 펑펑 울었다. 내 슬픔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엄청나게 상처를 받았던 주제에 나도 그 이후로 그에 대해서 추억하는 페이스북 추모글 같은 것이 올라올 때마다 울컥 눈물이 올라오는 것을 참고 속으로 좀 비웃었다. 혼자 슬퍼하면 되지 그걸 왜 남들한테 알리려고 저렇게 안달이야. 죽은 사람은 보지도 못하는데.


지나고 보니 두 기억 다 내게 흐릿한 데다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면 눈물부터 왈칵 난다. 당시에 내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돌봐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갑작스러운 상실이라는 공유되는 감정 때문에 두 기억이 굉장히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커다란 일렁거림이 내 안에서 너울거린다. 그렇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고, 오늘 4.16 사회적 기억 아카데미에서 말을 꺼낼 때마다 코찔찔이가 되어 눈물을 터뜨려서 너무 부끄러웠지만 꿋꿋하게 계속 울었다. 왜냐면 나는 자랑스러운 피스모모니까!


마무리 발언 때도 잠깐 이야기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슬픔의 힘을 믿는다. 슬픔의 표현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연대의 계기를 주고, 실컷 울고 난 사람에게 웃을 수 있는 힘을 준다. 딱딱하고 세련된 마음으로 잰 체하는 운동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피스모모의 슬픔을 표현하고 나누는 연대에서 나는 늘 강한 힘을 느낀다.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 많이 애쓰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좀 힘들어서 저녁 내내 기절해서 잠들었다.)



각자의 기억에 대해서 그룹별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한 뒤에 워크숍 진행자인 아영이 말했다. 기억은 기록으로, 기억으로, 몸의 기억으로 남는다고.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기억이 타인과 공유하는 기억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점점 범위를 넓혀서 사회적 기억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내 기억은 감정으로써 내 몸이라는 그릇에 담겼다. 나는 감정이 기억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을,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누고 연대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남기려면 사회적 기억을 통해 다 같이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사회적 기억의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 담길까? 그 답이 바로 '공간'이었는데, 나는 이 지점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


4.16 기억교실이 꼭 단원고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지난 3월 31일, 반짝다큐페스티벌에서 담롱님의 「기억의 공간들」을 보며 아주 잠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내 주변에 4.16 기억교실이 단원고에 있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설득을 해야 했던 것도 아니었고, 나는 유족들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들의 충분한 애도를 위해 그럴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논리 없이 그저, 감정의 영역에서 연대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반대하시는 분들의 논리와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질문 자체가 이상했다. 내 스스로 정리하며 만든 조악한 예시긴 하지만, 경복궁이 경복궁의 위치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공간이고 역사가 있으니까. 경복궁을 그대로 뜯어다가 조립하는 대공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원래의 경복궁과는 좀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이 지점에서 머리가 좀 띵했다.


4.16 기억에, 그리고 단원고 아이들의 사회적 기억에 몸통이 있다면 그게 어디에 있어야 할까? 어디에 있어야 '우리 아이들이 창고에 처박혀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살아있는 공간'에서 함께 그 사회적 기억을 모두에게 나누고 연대해 나갈 수 있을까? 우리가 던져야 했던 질문은 그런 것들 아니었을까? 4.16 기억저장소에서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4.16 사회적 기억 아카데미 14기의 첫 프로그램이 끝나며 든 생각들이었다.


마지막 마무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명으로 초대받게 되었을 때 이 이야기를 나누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하지만 당시엔 감정이 너무 정신없이 밀려와있어서 기억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 하느라 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더 늦으면 지금 떠오른 이 생각이 다른 생각과 감정에 밀려 지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서없어도 일단 글을 남겨놓는다. 오늘치 체력 소진 끝. 정말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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