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교육진행자되기 교육소감 ②
"선생님 이 유튜버 닮았어요!" "야, 왜 그래, 이 사람 레즈비언 유튜버잖아." (황급히) "선생님, 그래도 이 사람 잘생쁨으로 유명해요. 선생님도 잘생쁨!"
이번 교육을 나가서 쉬는 시간에 주고받았던 대화의 일부다. 나는 웃으면서 이분이 나보다 훨씬 잘생겼는데 닮았다고 해줘서 기분이 좋다고 대답했다.
여중에 평화 배움을 하러 갔기 때문에 나는 의도적으로 평소처럼 화장을 하지 않고 나갔다. 양말은 짝짝이에, 중성적인 슬랙스와 맨투맨을 입고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니트를 입고 간 것도 이래저래 고민을 많이 한 복장이었다. (물론 고민을 했다는 뜻이 평소와 크게 달랐다는 뜻은 아니다) 참여자들이 나를 보고 '퀴어함'을 떠올렸다면 내가 의도한 복장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야, 왜 그래"라는 말의 뉘앙스에서는 "그런 말은 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수 있다"라는 전제가 깔려있음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이 것을 어떻게 배움으로 연결 지을지 생각해 보았지만, 섣불리 대화소재로 사용했다가 가르치는 말이 될까 봐 꾹 참고 돌아와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사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무슨 말만 하면 사람을 가르치려 든다고, 오랜 친구들이 아주 학을 떼는 버릇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 요 몇 년간은 최대한 입을 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에너지를 쓰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평화 배움을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혐오'에 맞닥뜨리는 그 순간, 어떤 언어로 어떻게 풀어내야 '아하'모먼트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을 멈출 수도 없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가르치지 않고 '서로 배운다'는 피스모모의 철학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잘생겼다거나 남자 같다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특별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중고등 학생 때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머리를 남자처럼 확 자르거나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 말투, 취미, 성격 모든 것은 도마에 오르며 판단당하곤 했다. 얼마만큼 '여자 같은 지', 혹은 얼마만큼 '남자 같은 지'. 주로 후자에 치우친 평가가 많았다. 나는 그때, 주변 여자애들을 한껏 낮잡아보며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거만한 생각도 좀 했던 것 같다.
대학생 때,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너 너무 남자애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한 동기 언니가 내게 걱정 어린 얼굴로 물은 적이 있다. 괜찮아? 나라면 너무 상처일 것 같아. 나는 그 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 말이 상처라는 것일까? 반대로, 이 말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럼 무엇일까? 한동안 곱씹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 나는 내 몸에서 오랫동안 벗어나고 싶어 했구나. 저 말들이 너는 그 몸에 갇히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말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몸의 한계를 인정하고 벗어날 수 없음을 전제로 깐 말들이었을 텐데.
상호상담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 개인사를 공유하니 "나는 완벽한 여자예요."라는 말을 해보라고 디렉션을 주신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게 그렇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얼마 전 퀴어에 대해 다루는 시간에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완벽한 여자이고 싶지 않다고. 왜 여자 아니면 남자여야 하는지 그 이분법적인 사고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나는 내가 지금 완벽하다고 생각한다고. 듣던 분들은 낯설어하셨다. 겉보기에 나는 결혼까지 한 이성애자 시스젠더로 세상의 규범에 완벽히 들어맞는 '여자'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 이야기 전에 '내 주변에 퀴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이런 수업을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시간 낭비 같다.'라고 이야기하신 분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이성애 중심주의로, 그리고 유성애 중심주의로 굴러가고 있는가 가끔 생각한다. 당연히 남녀 간에는 친구가 없다고, 두 사람이 호의를 주고받으면 당연히 연애감정으로 발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좀 웃긴다. 내가 대학생 때 내가 삽질을 엄청하게 만들었던 여자애들은 내가 당연히 자기에게 우정 외의 감정을 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나에게 엄청 치댔다. 내 무릎에 앉아서 애교를 부리고(안주를 입까지 집어달라고 떼를 쓴다거나), 끌어안고 볼뽀뽀를 하고 커플 아이템을 맞추고 술에 취할 때마다 전화를 해서 의지하면서도 내가 여자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내 첫 키스까지 받아간 여자애도 자기는 전혀 나에게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기 때문에 나는 몹시 외로워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럼 여태 나한테 한건 뭐였는데? 잔인한 이성애자 계집애들.
남녀 간에 친구 없다는 말은 단적으로 퀴어의 존재를 지우는 말인 것이다. 서로를 연애대상으로 볼 수 있는 순간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면, 어떤 존재들에게는 친구가 없을 수도, 있다 없을 수도 있고 뭐 그런 건가. 나는? 나는 내게 삽질하게 만들었던 그 이성애자 계집아이들과 아직도 찐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선을 지켜달라는 커밍아웃과 함께.
뭔가 이런 잡다한 생각들을 불쑥하면서 우리 속에 다양한 존재들이 있을 테니, 언어에서 그 존재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주의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해야 했었다는 후회를 계속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이미 그 친구들은 레즈비언 유튜버가 거의 100만에 가까운 팔로워들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보며 자라는 세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 콘텐츠를 음지에서 숨겨가며 보는 것이 아니라 반 친구들과 공유하고, 처음 보는 선생님에게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시대.
나는 '동성애'하다가 걸리거나 '자해'를 하다가 걸리면 전교생이 지나다니는 교무실 앞에 자기 책상을 들고 내려가 수업도 듣지 못하고 며칠 동안 반성문을 쓰고 교육봉사를 해야 하는 학교를 졸업했다. 쇼트커트와 바지교복이 '동성애'의 상징이라 금지되던 시절을 겪었다. 대학에서 아웃팅이 터지면 휴학을 하던 시기를 겪었다. 내가 어딘지 이상한 건 아닌지 정보를 인터넷에서 알음알음 찾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내가 원했던 언어적인 지지와 지금 이 아이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또 좀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야, 왜 그래."라는 작은 말에 꽂혔던 것은 진짜 사소한 부분 아니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배경이 감정에 영향을 미쳐서 그들이 내게 나누고 싶었던 것의 더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할 뻔한 것은 아닐까?
돌아와서 한참 고민을 하다가, 청소년 참여자들과의 접점이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내가 섣불리 가르치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추천받은 유튜브를 보면서 요즘 트렌드를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