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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헤라디야 Oct 21. 2023

암사자의 이빨이 드러난 순간

우리의 관점은 다르기에 더욱 아름답다 - 3

친구 D와 미국에서 방문한 D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하루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서울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남산골 한옥마을과 N서울타워를 돌아봤으며, 동대문의 우즈베키스탄 식당에서 맛깔스러운 식사를 하고 깊은 역사를 지닌 대학로의 학림다방에 들러 달콤한 비엔나커피도 즐겼다. D는 또 다른 친구 J가 저녁에 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두세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렇다고 또 카페에 가기는 너무 애매했다. 두 사람이 묵고 있는 곳은 성균관 대학교 근처의 한 숙박시설이었다. J가 올 때까지 우리는 좁은 방 안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다가 야외 테이블이 있는 근처의 편의점으로 갔다. D 모자는 맥주를, 나는 다소 수상쩍어 보이는 일본산 하이볼을 선택했다. 대체 어떤 위스키를 넣은 건지 모르겠지만 단번에 내 선택을 후회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교통 체증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J는 예정보다 꽤 늦게 도착했다. 잠실부터 차를 몰고 왔다는 J는 사실 딴 속셈이 있는 듯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근처에 있는 엄청나게 매운 커리를 파는 페르시아 식당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약 25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식당은 나도 아주 오래전에 가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평균 매운맛'으로 시켰다가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식사를 마쳤었다. 정말 다행히도 이날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편의점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페르시아 식당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주문이 마감됐기 때문이다. 나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응?)


아까까지만 해도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던 D의 어머니도 이젠 밥 생각이 난다고 말할 정도였다. 원래 뭔가를 기대했다가 얻지 못하면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갈망이 올라오게 마련이니까. 이걸 어쩐다. 조금만 걸으면 맥도널드와 새로 오픈한 파파이스 매장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쌀쌀해진 날씨의 D의 어머니가 또 거기까지 이동했다가 돌아오고 싶어 할지는 미지수였다. "저긴 어때?" 아, 다행히도 때마침 바로 옆의 식당이 열려 있었다. '화요일 스페셜 메뉴는 치즈버거 세트. 감자튀김과 음료 포함. 9,900원.' 우리의 세 미국인을 만족시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메뉴였다.


"어서 오세요." 우리를 맞아 준 직원은 아무리 봐도 동남아계로 보였지만 거의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다. 우리는 치즈버거 세트 네 개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에 나온 치즈버거 세트는 상당히 맛있었고, 세 미국인은 만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케첩이 작고 깜찍한 종지에 담겨 나온 것만 빼면. "케첩 더 달라고 하자. 미국인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분량이야." 내가 직원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케첩 좀 더 주실래요? 미국에서 오셔서 이걸로는 부족하대요." 직원은 이해한다는 듯이 웃으며 친절하게도 케첩 병을 통째로 가져다주었고, 세 미국인은 지극히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종지 위에 케첩을 주욱 짜서 가득 담았다. 케첩을 잔뜩 묻힌 감자튀김은 하나씩 우리 뱃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그 정도면 케첩에 감자튀김을 묻힌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맛있으면 어떠랴. 어릴 때 케첩을 싫어해서 분식집 아주머니가 핫도그에 케첩을 쳤다고 엉엉 운 기억이 있는 나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감자튀김과 케첩은 찰떡궁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터였다.




암사자를 그리려다 무참히 실패. 치즈버거 그림으로 대신한다.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자 다들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즐거웠던 하루는 그렇게 평화롭게 마무리될 듯했는데... D와 D의 어머니가 그 치즈버거 세트를 에너지로 삼아 정치적 논쟁을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미국에서 비행기로 열몇 시간 떨어진 머나먼 한국 땅에서, 두 사람은 일반적인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를 대변하는 듯한 논쟁을 벌였다. "넌 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언론에 영향을 받지 않아서 그게 불만인 거야." D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뇨, 엄마. 우리는 누구나 매체에 영향을 받아요. 그러지 않을 수가 없어요." D가 반박했다. "내가 보는 뉴스와 내가 듣는 팟캐스트에서 나오는 얘기는 서로 일치해. 그렇다면 그게 진실이라는 얘기 아니니?" (D의 어머니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는 아마 우리나라로 치자면 극우 유튜브 채널쯤 되는 듯했다.) "아니, 그건 아니죠." 내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치면 D가 접하는 뉴스와 뉴스캐스트도 서로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을 텐데, 그러면 그것도 진실이겠네요?"


스스럼없는 미소를 짓고 가는 곳마다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트던 D의 어머니는 D가 미리 경고(?)했던 대로 정말로 극우 성향이었다. 원래 사람이란 누구나 첫인상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여러 가지 면모를 지닌 법이다. 알고 보니 그 집에는 총이 무척 많으며, D의 어머니는 공군 출신에 아직도 정기적으로 사격을 연습한다고 했다. 와우! 암사자가 따로 없으시네요.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충실한 만큼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도 몹시 충실했고, 맹렬하게 그 신념을 보호하려 싸웠다. 암사자의 이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D 모자가 설전을 벌이는 동안 사람 좋은 J는 중간에서 간간히 중재를 하려 들었고, 나는 열심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의견 중 어느 쪽도 전적으로 옮거나 전적으로 그르지 않았다. 아마 두 사람이 접하는 매체의 내용도 100% 중립적으로 사실이지는 않을 테고,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는 왜곡된 지식과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데 정치에 관심이 크지 않은 나로서도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 왔다. 한국 얘기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D의 어머니는 자신은 한국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의견을 낼 자격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한국인도 미국의 정치에 대해 의견을 낼 자격은 없다고 말했다. "아니요. 미국의 정치는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쳐요. 우리에게는 미국의 정치에 대한 의견을 품을 자격이 있어요. 어머님도 마찬가지로 한국에 대해서 더 아시게 되면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의견을 품게 되실 테고요." 물론 D의 어머니는 미국의 정치가 어떻게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그걸 자세히 설명할 배경지식이 없었다. 차라리 다행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게 배경지식이 있었다면 그날 밤의 논쟁은 식당이 영업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계속됐을 테니까. 개인주의자에 가까운 나로서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관해 의견을 피력할 자격이 없다는 말 자체가 몹시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많은 대화가 오난 끝에 기나긴 논쟁이 마무리된 것은 J가 이제 그만 갈 시간이라며 일어섰기 때문이다. 막상 작별할 때가 되자 D의 어머니는 다소 민망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포옹하며 말했다. "저는 정치 얘기 잘 안 하는데 오늘 어머님 덕분에 목소리 좀 높였네요. 재미있었어요." D의 어머니는 그 말에 만족했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녀로서는 자신이 진심으로 옳다고 믿는 것을 고수할 뿐인데 그 때문에 핍박(?) 받는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D의 어머니가 출국할 때까지 모자가 함께 보낼 시간은 이제 하루 반 남아 있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방문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차이가 모자간의 애정을 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문하기 한참 전부터 어색한 표정으로 D가 한 말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게 우리 어머니는 나랑 많이 다르셔." 좀 다르실 수도 있지. 사람이 어떻게 다 똑같겠니. 우리 모두는 다르기에 더 아름다운 존재 아닐까? 서로의 관점을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풍요로운 곳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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