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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헤라디야 Oct 23. 2023

손절을 위한 시간

무양심 단기 하우스메이트를 내쫓다

자취를 시작한 지도 10-11년이 되어 간다. 매달 월세를 내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나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리 아깝지는 않다.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건 여러 모로 좋은 일이다. 물론 나처럼 우울증이 있는 경우는 그런 점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건 그 공간을 가꾸고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내 공간은 그다지 깔끔하거나 멋지지 못하다. 조만간 조금씩 청소를 시작할 에너지를 키워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집을 공유한 적이 몇 번 있다. 잠시 캐나다에서 생활할 때 그랬었고, 또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 가까운 친구와 함께 반년 정도 지냈다. 다소 보수적인 내향인인 내가 자유분방한 성격의 외향인인 이 친구와 지내면서 의외로 에너지가 빠질 일이 많았는데, 그녀는 가끔씩 애인과의 문제에 관해 저녁에 두 시간씩 쉬지도 않고 얘기하곤 했다. 그 외에도 몇몇 문제가 겹쳐서 우리는 우정을 보전하기 위해 따로 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지금 사는 집에 이사 왔을 때도 사정상 바로 전의 입주자와 3달 정도 하우스메이트로 지내야 했다. 그녀는 신박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는데, 내 식재료를 가져다가 요리를 하면서도 내게 한 입도 권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끓인 라면 한 개와 내가 식당에서 대접한 인도 요리의 가치가 동일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사교적이고 깔끔한 성격의 그녀에게는 다소 굼뜨고 청소에 큰 관심이 없는 나와 지내는 게 답답했을 수도 있다. 내게 모든 가구와 집기를 팔고 이사를 나간 후에도 그녀는 굳이 내가 집에 없을 때 자기 물건을 찾으러 오겠다고 '통보'했고, 나는 절대로 안 된다고 벽을 쳤다. 애초에 이사 가면서 옛집 열쇠를 굳이 가져가서 그걸로 문을 따고 들어올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얼마 후에 큰 물건도 아니고 '거품기'를 빌려달라는 문자에 싫다고 대답하자 더 이상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있던 이후로 나는 하우스메이트를 절대 들이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몇 년 전에 단기적으로 그 결심을 깬 일이 한 번 있다. 그저 안면만 있던 지인 H가 언제부터인가 페이스북으로 '주인집에서 개가 짖는다고 뭐라고 한다'는 말을 올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가 '개를 키울 거면 이사하라고 한다'는 말로 바뀌었다. 나는 지금 사는 집에 오기 전에 고양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주인집의 일방적인 등쌀에 못 이겨 내쫓기듯 이사를 나온 적이 있는데, 그 기억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H의 페이스북에는 '개 한 마리가 임신한 상태인데 갈 곳이 없다'는 말까지 올라왔다. 여기저기 머물 곳을 수소문하는 듯했다.


나는 정말로 마음이 약해졌다. 우리 건물은 과거에 개를 키우는 사람도 있었고, 원룸이 아닌 빌라식 건물이라 거주 가구가 많지 않았다. 한두 달 정도라면 지내게 해도 될 듯싶었다. 다른 것보다 모텔방에서 강아지들이 태어나는 걸 정말로 원치 않았다. (애초에 개 세 마리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할 모텔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도 갈 곳을 수소문하는 H의 글은 계속 올라왔다. 마침 때는 12월 초중순이었다. 거리에서는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이웃(?)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결국 H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H의 답변은 묘했다.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 했어요." 안면밖에 없는 내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는 뜻인가? 나는 잠시 기분이 쎄해졌지만 애초에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었던 터라 잠시 우리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H와 개들을 위해 큰 방을 비워두었고 고양이들과 나는 발코니와 연결된 작은 방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호구 짓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H는 개 세 마리를 데리고 우리 집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중 한 마리는 배가 남산만큼 부른 상태였다. 아버지 개는 당연히 두 마리의 수컷 중 하나였다. '암수를 섞어 키우면서 수술 안 시켰어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어미개 뱃속의 강아지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시점에서 그런 질문은 시간낭비 같았다. H는 밥 먹을 곳도 많고 여유로운 분위기의 이 동네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나는 갈 곳 없는 H가 딱하게 느껴져서 밥도 몇 번 사 먹였고, 최대한 간섭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외출을 했는데 H에게 열쇠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얼마 안 가서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H는 그 사이에 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집 앞 식당에 가서 맛있게 식사를 즐기고 왔다. 기가 막혔다. 위층에 사는 친구가 내 비상열쇠를 가지고 있던 터라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걸 내줄 수 있었는데, 굳이 한두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나갔다 왔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집안에는 내 고양이들과 내 전재산, 그리고 H의 개들이 있지 않은가. H는 내가 왜 기가 막혀하는지 이해를 못 한 눈치였다. (참고로 잃어버렸다던 그 열쇠는 얼마 후에 침대의 매트리스 옆에서 나왔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 번은 내가 이 집에 이사 온 후 처음으로 변기가 막히는 일이 생겼다. 개가 배변 실수를 하자 H가 그걸 키친타월로 닦아서 화장실에 내리려다 변기가 막힌 것이다. '왜 변기에 키친타월을 내렸느냐?'는 질문에 H는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변기가 수압이 그렇게 약해요?"


그렇지만 H를 내보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따로 있었다. 나는 공동주택인 만큼 개들이 거실에서 짖지 못하게 하라고 H에게 말해 놨는데, 하루는 새벽 1-2시에 배가 출출해졌다. 아직도 깨어 있던 H에게 집 앞 편의점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삼각김밥과 라면을 사서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는데 위쪽에서 계단을 타고 개들이 왕왕 짖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 현관에서 들릴 정도라면 맞은편에 사는 집에서는 어떻겠는가? 나는 당연히 화가 났고, H에게 늦은 시각인데 개들이 거실에서 짖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H의 반응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뭐 이 정도 짖는 것 가지고 그래요?' 그제서야 나는 알 것 같았다. H가 예전에 살던 집을 나와야 했던 그 이유를...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나가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산달이 된 개를 데리고 나가라고 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약했다. (해석: 내가 너무 호구였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기다렸다. 강아지들이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랄 그날을... 배가 남산 만하게 불러 있던 H의 개는 크리스마스이브 즈음에 새끼를 세 마리 낳았다. 솔직히 귀엽기는 정말 귀여웠다. 개나 고양이나 주로 수컷만 키웠던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입구 부분을 잘라서 마련해 준 상자 안에서 강아지들은 신나게 젖을 먹고 빨빨거리며 기어 다녔다. 그래, 너희가 무슨 죄겠니. 다 인간의 죄지. 나는 나중에 강아지들이 쓸 철망 펜스를 하나 선물하겠다고 H에게 말했다. (해석: 그걸 쓸 수 있는 다른 공간으로 나가시오.) 물론 H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이해했지만 모른 척한 건지도 모른다.


이른바 '생명의 기적'은 정말 기적 같았다. 그리고 강아지들은 무지무지하게 귀여웠다. 그거 하난 인정.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때마침(?) 한 친구가 구조한 새끼 고양이의 임시 보호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는 며칠 후에 방이 빌 테니 그때 고양이를 데려오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이제 강아지들은 생후 2주를 넘겨서 멀지 않은 거리라면 이동해도 될 정도였다. 나는 H에게 말했다. 고양이 임시 보호를 하기로 했으니 이제 방을 비워 줘야 할 것 같다고. H는 '고양이 때문엔 우리를 내보내는 건가요?'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행히도 알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방에서 작업하는 사이에 인사조차 없이, 열쇠는 주지도 않고, 신발만 놔두고 방을 빼 버렸다. 황당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안심은 됐다.


H에게 약속한 철망 펜스를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연락했다. H의 반응은 천연덕스러웠다. "죄송하긴 하지만 필요하니까 거기까지만 받을게요." 뭐 그런 비슷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어린 강아지들 때문에 평소보다 보일러를 세게 틀었던 터라 난방비 차액이 **원에서 **원 정도 더 나올 것 같다고, 그것만 보내달라고 말했더니 H는 내가 말한 최소한의 금액만을 보냈다. 나는 그 주소로 철망 펜스를 주문하고 H가 남기고 간 신발을 부쳤다. 그리고 즉시 H를 차단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은 내게 있어 좋은 교훈이었다. '내가 뭔가를 베풀고 싶다고 해서 그걸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베풀지는 말 것.' 가끔은 궁금하다. 지금쯤 H는 어느 누구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을까? 아마도 H는 나를 '괜히 인심 좋은 척 와서 살라고 하더니 잔소리만 하다가 쫓아낸 사람'으로 기억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내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도, 상대를 쫓아내는 것도 감당할 수 있다. 확실한 건 큰 이변이 없는 한 내 인생에 또 다른 하우스메이트는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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