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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연대 May 08. 2024

“문화에게 어떤 종류의 좋음을 요구할 수 있는가?”

<(가칭) 문화 읽기 모임>_『문화정책』(명인문화사)를 읽고_

<(가칭) 문화 읽기 모임>에서는 한 달 동안 '문화'와 관련한 도서를 읽고, 도서 내용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글쓰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첫 도서로는, '문화정책' 전반의 이해를 구하기위해『문화정책』(명인문화사)를 선정했고, 약 3주 정도 함께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문화에게 어떤 종류의 좋음을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공통의 질문이 발생했다. 그 배경은 『문화정책』에서 정책에 대해 언급한 다음의 내용 때문이었다. 

    정책에 대한 관심은 정책을 담은 문서 자체가 아니라 ‘정책 효과’ 임

    정책은 변화를 이루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지님  

    정책은 ‘무엇이라도’ 성취하도록 기대를 받거나 ‘무언가’와 관련되도록 기대받기 마련  

    문화정책이 다른 정책과 연관 지어 활용되는 과정에서 문화 자체의 ‘내재적’ 가치를 잃어버리게 됨  

위 내용을 정리하면 문화정책 역시 ‘정책’이라는 상위 개념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정책) 영역이라는 것이고 정책은 효과와 기대, 변화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책이라는 통합적 성격에 기반할 때 문화정책이 지닌 특수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책은 ‘문화’를 통해 어떤 효과와 기대를 요구하는 것인지 궁금증이 발생했다. 마침,『문화정책』에 등장하는 “문화에게 어떤 종류의 좋음을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문구가 모임 구성원들의 궁금증을 관통하는 질문이기에, 그에 따라 각자의 생각을 짧게 정리해 보기로 했다.




‘문화’의 좋음 이전에, 현상과 가치에 대한 해석을 선행해야_재상

문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정치, 경제, 사회 등)이나 기제와 결합하여 담론의 중층적인 경쟁, 부딪힘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유기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협력적 연결의 성격을 지닐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대항적 대치의 성격을 지닐 수도 있다. 


따라서 각 시대와 사회에서 지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미와 가치, 현상의 시스템과 이에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의식과 실천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사회를 관통하는 시스템의 헤게모니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 일상 의식에 침투해 있는지, 복잡한 사회구조(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등)의 뒤엉킴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문화적 실천을 행하고 있는지에 따라 문화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인의 교양적 개념, 특정 집단의 인류학적인 생활양식, 전통적 의미, 여가활동 및 오락 등 문화라는 통일성의 그물망에 다양한 형태의 문화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서로 교차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문화의 좋음이란 일상에서조차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정책적 효과 측면 역시 쉽게 편의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문화가 정책과 결합하면 너무나 가볍게 결과론적인 접근만을 일삼는 경우가 태반이다. “좋다”라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최대 다수가 최대로 유용할만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정책이 무언가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에 비춰 고민해야 할 지점은, “변화”일 것이다. 어디로의 변화를 이뤄갈 것인지, 변화의 이상을 상상하면서 그 과정에서 정책이라는 도구는 합리적으로 쓰여야 한다. 또한 그것이 문화의 영역에서의 정책이라면, “문화에게 어떤 종류의 좋음을 요구”하기 전에 지금 사회의 문화적 현상과 가치에 대한 해석을 선행해야 한다.


* 요시미 순야『문화연구(2008)』참고 및 인용



모두에게 당연하게 좋은 문화는 없다_지연

문화를 가치 판단하기 전에 문화의 정의에 대해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문화(文化)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이다. 곧, 문화는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의 행위를 포함함을 의미한다. 문화기본법 제3조는 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 법에서 문화란 문화예술, 생활양식, 공동체적 삶의 방식, 가치 체계, 전통 및 신념 등을 포함하는 사회나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적ㆍ물질적ㆍ지적ㆍ감성적 특성의 총체를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연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데, 그는 문화를 ‘사회 질서가 전달되고, 재생산되며, 경험되고 체험되는 의미 체계, 또는 모든 삶의 방식(whole way of life)으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문화가 모든 삶의 방식을 포괄한다면, 문화의 좋고 나쁨은 선택될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스터디에서 함께 읽은 책 『문화정책』은 문화정책이 국가의 자서전이라 표현하며, 더불어 정부가 선택한 좋은 문화를 선택하고 보급하는데, 정책을 활용함을 주장한다고 이해하였다. 


국가가 선택한 문화는 당연히 좋은 문화일까? 누구나에게 좋은 문화일까? 


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와 의제가 소위 ‘좋음’이란 가치판단 안에 모두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큼을 『문화정책』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좋은 문화에 대해, 정의하기보다는 다양성을 내포한 문화인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을 이 글을 통해서 하고 싶다. 모두에게 당연하게 좋은 문화는 없기 때문이다.




문화가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주체적인 논의와 합의가 중요하다_가나다라

‘좋음’이라는 가치판단이 포함된 단어를 ‘문화’라는 광범위하고 초점 잡기 어려운 단어와 등치 시키는 일이 합당한 지는 잘 모르겠다. 『문화정책』을 통해 한 달간 구성원들과 논의한 것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누구에 의해서’라는 질문과 맞닿을 수밖에 없는 등치이다. 문화라는 것이 어떠한 절대적 가치를 함유하고 있는지는 아직 손에 잡히지 않고, 문화가 어떠한 방향성을 따라 흘러갈 때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판단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때 어디로 향하는 가를 결정하는 주체가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핵심적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문화에게 어떤 종류의 좋음을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문화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려볼 수도 있다.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까지의 답변은 문화의 핵심은 관계성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OO문화(전통문화, 지역문화, 생활문화, 케이팝문화 등등)와 문화 OO(문화정책, 문화정치, 문화운동 등등)처럼 다른 것과 관계될 때 그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문화에게 요구되는 좋음의 종류가 달라진다. 여기서 관계성을 결정짓는 OO의 핵심주체 혹은 대상은 선택된다. 그 주체와 대상을 선택하는 기반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러니까 문화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에 생략된 것은 (누구에게)라는 괄호이다.


어디에나 따라붙는 ‘누구’라는 난제를 해소하기 위한 현재로서 가장 근접한 방법이 민주적 터를 만드는 것인 것 같다. 문화가 최대한 많은 인간-비인간에게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주체성을 가진 논의와 합의가 일어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화의 좋음이라는 일면을 생각해 보자면, 민주적 터를 만들어내는 좋음의 미션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문화의 좋음은 현상과 규범을 정의하는 실천으로부터 인식되는 것이다_송계란

문화로부터 찾을 수 있는 '좋음'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는 문화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반영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자, 문화의 창조자, 전승자, 변용과 변혁의 주체로 현실 세계에 참여한다. 즉, 문화를 창조하고 전달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맥락 속에 문화적인 요소들과 상호 연관성을 가진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관, 신념, 행동양식 따위를 포함하는 복합성을 지니며, 이는 다시 문화의 다양성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양한 문화에 대해 어떤 좋음을 시사하고 있는가. 좋음이란 맥락에서 해석하고자 함에도 결국 왜 좋은가란 물음으로 이어진다. ‘문화’의 개념은 앞서 다룬 바와 같이 총체적인 만큼 어떤 관점에서 정의하느냐에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단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문화의 지원조건(정책)을 살펴보며, 문화의 정의된 좋음을 읽어 볼 수 있다. 


행정에서의 문화는 사회 공동체가 관심을 기울이고 귀하게 여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문화가 개인과 사회,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본원적 가치(전통적), 공동체 구성원 간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사회적 가치, 그리고 문화 활동을 통해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가치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각종 근거로 인해 우리는 문화가 좋은 것 또는 사회에 필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다만, 이러한 문화의 좋음과 정의는 문화 결과물을 토대로 선별적으로 판단하는 도구적인 이념이자, 가치를 평가하려는 지배적인 수단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문화의 필요성(좋음)은 어찌 보면 앞서 읽었던 ‘문화행정’에서의 ‘선별적 전통’이란 개념과 같이 필요에 의한 수단으로 해석될 수 있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는 문화가 가지는 좋음을 이미 산출된 정의를 통해 인식하는 만큼, 인식하지 못하는 문화의 새로운 양상을 추적, 정의하려는 문화연구의 시도들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앞서 정의한 행정에서의 문화의 좋음이 우리에게 내재화된 배경을 생각한다면, 사회적 규정에 따른 ‘상황의 정의’를 따른다고 보통 말한다. 문화적 현상과 행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추구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으로 결국 문화의 좋음은 후천적인 정의인 셈이다.


주제로 돌아가, 문화에게 어떤 종류의 좋음을 요구할 수 있는가. 결국, 문화행정’을 읽으며 우리는 문화가 가진 모호함에 몇 번이고 직면했으나, 이번에는 이러한 모호함에 ‘좋음’의 의미를 두고자 한다. 다소 비약이겠으나, 문화를 총체적, 후천적인 것으로 보았던 만큼 관측된 현상을 하나의 문화로 정의하기까지 다양한 연구와 경합이 따르고 이를 통해 유발되는 에너지와 논쟁들이야 말로 우리가 문화에게 요구할 수 있는 좋음의 맥락 중 하나로 생각된다. 


이처럼 앞서 행정에서 문화라는 추상을 변조함으로써 지원조건을 획득한 것처럼 우리는 문화를 포착하기 위해 다양한 맥락과 연결된 사회적 현상과 규범을 정의하는 시도에 의미가 있는 만큼 위 스터디의 정체성과도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칭) 문화 읽기 모임>

‘문화정책’, ‘문화담론’, ‘문화운동’을 키워드삼아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 활동가, 기획자, 예술가가 모였다. 구성원들은 각 현장에서 쓰이고 있는 “문화”의 실체와 성격을 체감하며 “문화”자체가 지닌 본질적 의미를 되살펴보고 있다. <(가칭) 문화 읽기 모임>은 활동하면서 느낀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개념을 자신들만의 관점과 방식으로 정리하며 의문과 갈증을 풀어보려 한다. 현장에서 경험한 실질적인 내용과 현상을 좀 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정리하고 각자의 표현으로 언어화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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