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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문화운동과 문화정책의 핵심 과제_①탈성장

삶의 지속가능을 위한 '탈성장'

by 문화연대
[이후 문화운동과 문화정책의 핵심 과제]는 문화연대가 대선 이후 문화운동과 문화정책의 방향을 모색하며, ‘삶의 지속가능성’, ‘문화공공성’, ‘문화 민주주의’, ‘문화자치’라는 네 가지 핵심 과제와 이에 대한 대안을 제안합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한 ‘탈성장’이 필요할 뿐


이원재_문화연대 집행위원장


선거는 끝났다.

내란 잔치 역시 끝났다. 윤석열의 12.3 불법 계엄 사태로 인해 촉발된 조기 대선이었던 만큼 내란 세력에 대한 1차원적인, 제도 정치 차원의 단죄가 정권 교체로 진행된 셈이다. 내란 세력 국민의힘은 소멸 위기를 마주하게 됐고, 더불어민주당은 거대 여당의 위치를 차지했다. 사회운동 진영은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일반적이고 성의 없는 정리다.

지난 박근혜 탄핵 및 조기 대선 국면과는 사뭇 달랐다. 처음이 아닌 두 번째였기 때문일까. 박근혜 탄핵‧파면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일까. 또다시 시민들과 광장의 힘으로 되찾아 온 민주주의의 역동성은 더 많은, 다양한, 실험적인, 직접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마도 뜨거운 시민들과 광장의 열기에 비해 취약해진(준비되지 않은)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소멸 직전의 위기에 빠진 진보정당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하여 더욱 보수화된 제도 정치 지형 그리고 이 모든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며 체제에 균열을 낼 새로운 주체의 부재 등 다양한 이유와 조건이 서로 얽힌 채 작동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책임을 떠나 시민의 힘으로 반민주적이며 부패한 윤석열 정권을 3년 만에 끝장냈지만, 아직 시대적 흐름에 맞는 새로운 문을 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대선은 여러 맥락에서 중요한 선거였다.

이미 시민의 직접민주주의로 시대착오적이고 무능하며 부패한 권력을 퇴출했으니 정권 교체는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선거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좀 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민주주의 공론장과 정책 제도화(사회적 문제의 주류화)를 위한 과감한 실험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다음 사회로 이행하는 중요한 디딤돌을 놓아야 했다. 그 흔하고 표면적인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 수준이 아니라 기후위기‧생물종다양성(생태위기), 인공지능‧기술과잉(기술위기), 초고령화(인구위기), 수도권집중‧지방소멸(지역위기), 불평등‧양극화(계급위기), 혐오‧차별(정치위기), 고립‧외로움(개인위기) 등 문명 대전환과 다중 위기 시대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한 절박한 의제들을 노골적으로 수면 위에 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우려처럼, 예상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국민주권정부’를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통령(당시 후보)은 ‘안전한 승리’를 위해 시대적 흐름과 과제를 외면한 채 ‘보수’, ‘경제위기’ 그리고 ‘성장’을 선택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은 곳곳에서 모순적이고 충돌적이다. 일관된 세계관과 가치가 부재한 채 실용주의라는 구호 아래 민주주의와 성장주의가 곳곳에서 괴이한 동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민주주의의 옷을 살짝 걸친 정치권력 중심의 실용주의라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는 사회운동 세력과 소수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민주노동당의 권영국 후보 역시 다르지 않다. 표면적인 정치 구도에서는 ‘보수 Vs 진보’로 형식적, 정치적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그 내용이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성장 지향의 노동사회 내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비롯하여 피지배 계급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그것만으로 해결될 세계가 아니다. 생태, 문화, 기술 등 노동이나 젠더 못지않게 본질적인 사회변동의 문제들에 있어 사실상 거의 나아가지 못했다. 새로운 당명인 ‘민주노동당’은 어쩌면 그냥 일시적인 호칭이 아니라 명백한 실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그렇게 시민의 힘으로 조기 대선이라는 정치적 전환의 장이 열렸지만, 주류도 비주류도 그 민주주의의 새로운 감각과 공론장을 너무나 손쉽게 닫아 버렸다. 성장 혹은 성장의 다른 이름으로서 진보라는 기대 속에서 말이다.


오늘날 경제와 노동 중심의 성장은 미래를 위한 희망이 아니라 낡은, 죽음의 관뚜껑에 불과하다.

더 이상 성장에 대한 비판과 경고는 결코 윤리적이고 당위론적인 주장이 아니다. 너무나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애써 눈을 돌린다 해도 그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1972년 로마클럽에 제출한 보고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 이후 인류의 대다수는 성장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늘 눈을 돌려 왔지만, 현실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 인류의 고도화된 과학으로 측정‧판단 가능한 모든 증거가 이 심각한 위기의 범인으로 ‘성장’을 지목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표현처럼 “김대중이든 박정희든” 상관없이 성장주의는 절대적 신화가, 아니 범인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를 초과한”(2024년 기준) 기후 붕괴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불과 50년 사이에 “야생 동물 개체군이 73% 감소하고, 담수 생태계가 85% 감소했으며, 해양 생태계는 56% 감소한”(2024년 기준) 지구에서 스스로 멸종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기후위기, 생물 다양성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환경 변화의 심각성을 판단하는 기준인 ‘지구 위험 한계선’(planetary boundaries) 9개 지표의 상당수가 이미 한계선을 넘어섰거나 빠르게 한계선에 도달하고 있다.

인간 중심, 자본 중심의 성장주의는 환경 파괴만 낳은 게 아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압축적으로 성장한 나라에서 매우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은 “25명이 태어나고 1.5명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2024년 기준) 사회다. “소득 상위 10% 인구가 전체 국민 소득의 46.5%를 점유”하고 있으며,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건강수명 차이는 계속 늘어나 8.4세까지”(2020년 기준) 격차가 벌어졌다. 지구적 글로벌 공급망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더욱 심각하다. “시간당 3천만 달러가 글로벌 사우스에서 글로벌 노스의 수퍼리치 1%에게 가고 있”으며, “전세계 인구의 44%에 해당하는 약 36억 명이 하루 6.85달러(약 1만원)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2022년 기준) 성장은 미래를 위한 희망이 아니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지속가능한 성장(발전)은 현실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속가능한 삶과 세계를 위해서는 ‘탈성장’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탈성장의 관점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고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면, 탈성장은 너무 원칙적이거나 낭만적이라고 느낄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탈성장을 둘러싼 다양한 오해가 있다. 먼저, 탈성장은 불필요하거나 과장된 주장이며 지속 가능한 성장은 가능하다는 착각이다. 이미 앞서 제시한 자연-개인-사회 공동체의 다중 위기와 이에 대한 각종 지표(데이터)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확인되듯이,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성장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속 가능한 성장(발전)이란 그냥 믿음이자 바램일 뿐이다. 부정선거 다르지 않은.

다음으로 탈성장이 모든 현대 기술과 경제 그리고 사회적 편의를 맹목적으로 거부하며 자연 환원주의적 지향을 통해 인류의 삶을 위축시키고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탈성장은 이러한 주장과 달리 “특정한 경제활동과 생산 및 소비 형태를 구분하고 사회적 필요, 정의, 돌봄,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여 그중 일부는 규모를 축소하고 다른 일부는 번성시키는 정책”을 지향한다. 탈성장은 문명 전환과 다중 위기의 시대에서 탈식민주의, 반자본주의‧비자본주의, 페미니즘, 생태문화 등의 관점을 통해 문화, 정치, 경제, 사회의 재구성과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탈성장 정책은 “(1)경제의 민주화, (2)재분배 및 사회보장, (3)기술의 민주화, (4)노동의 재평가, (5)사회적 신진대사의 민주화, (6)국제 연대”(마티아스 슈멜처‧안드레아 베터‧아론 반신티안, 김현우‧이보아 옮김, 나름북스, 2023.) 그리고 (7)문화민주주의와 문화사회로의 이행 등에 주목해야 한다.


새 정부의 문화정책을 비롯하여 앞으로 준비해야 할 문화정책의 핵심적 가치 역시 탈성장이다.

우리 사회의 문화정책 역시 성장주의 세계관 속에서 국가‧행정 권력 주도, 서울‧수도권 중심, 양적 팽창과 경쟁 중심의 문화사업을 쏟아내 왔다. 지난 20여 년 동안 최대한 빨리, 가장 많이,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한 성장주의, 성과주의(결과주의) 문화사업을 압축적으로, 민관협력을 통해 추진해 온 셈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가장 문화적이지 않은 방법과 과정을 통해 이루어 낸 K-컬처의 시대를 자부심을 느끼며 소비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체계 속에서 K-컬처의 국가주의‧제국주의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K-컬처의 본질은 여전히 성장 중심의 개발도상 체제다. 수많은 문화 노동자의 착취, 철저하게 위계화되고 획일화된 상품 미학, 정경 유착된 자본 권력의 시장 독점 등이 K-컬처의 실질적인 지배구조이기 때문이다.

문화자본과 문화산업만이 아니다. 지역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수도권 중심의 공급형 지역문화 행정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지역의 주체들조차 사실은 성장주의의 토대 위에서 공생(공멸)하고 있다. 겉으로는 지역의 가치를 주장하지만, 배타적인 지역 성장주의와 지역 간 경쟁주의만이 지역문화 생태계 내에서 생존하며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문화정책의 새로운 문을 열기 위해서는 탈성장의 관점에서 문화정책의 재구성을 모색해야 한다. 국가 문화정책의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하기 위한 탈성장 관점의 국가 문화정책 철학과 비전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예술(미학), 지역문화(지역자치), 문화산업(문화경제), 스포츠‧관광‧여가(생활문화), 문화유산(전통문화) 등이 삶-체제의 전환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자리 잡아갈 수 있어야 한다. 새 정부 출범에 취해서 문화 발전을 위한 사업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가 아니라 탈성장 문화사회를 위해 삶-체제를 전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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