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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연 보는 휘 Feb 20. 2020

관객과 공연의 아슬한 경계에 대해

2020 봄학기 수업 노트1

    


    2015년부터 2017년까지, "관객"에 대해 생각이 맞는 친구들과 관객을 위한 관객이 만드는 웹진 <월간 이선좌>를 발행했었다. 당시의 나는 관객을 단순히 배우를 보러 다니는 그루피로 치부하는 공연계의 편견에 염증이 나있었고, 그 염증을 원동력으로 해서 열성을 다해 일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을 꺼내보게 된 건, 이번 <연극 이론> 수업 3주 차, 관객을 주제로 한 수업이었다.


    세 이론 다 공연장에서의 관객의 존재에 대한 연구였는데, 서로 포인트가 약간씩 다른 게 흥미롭다. Caroline Heim은 공연자로서 관객을 읽는다. 공연장 내의 관객도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반응을 하고, 박수는 언제 치는지, 언제 나가는지 등 사소해 보이는 행동들이 다 관객의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점이다. (2016년에 나온 이론 치고는 조금 감이 늦다.) Jacques Rancière (2009)는 해방자로서의 관객에 대해 이야기하며, 관객 역시 일종의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수동적으로 공연을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 관객 역시 공연을 보며 일종의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Helena Grehan (2009)은 레비나스 이론에 천착하여,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연극에서 관객이 타자를 마주한다고 주장한다. 윤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과정에서 타자의 존재를 이해라는 틀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게 되고, 불편함과 불편함에 대해 재고하는 양가 정동에서 의미의 가능성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세 이론가 모두 짚고 넘어가는 점이 관객은 저마다 나름의 의미 창출 과정을 한다는 점이다. 공연에 치중하는 분석에서 놓치고 넘어가기 쉬운 지점이다.


    아티클을 읽으면서 <월간 이선좌> 생각이 많이 났다. 토의 과정에서 "왜 이 이론가들은 관객을 분석하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질문과 관련하여 공연자와 관객 간의 관계가 흥미롭다. 관객을 분석하는 과정은 한 친구의 말처럼 관객을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객 상 안에 가두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관객을 낮잡아보는 시선에 대한 대항 과정이자 일종의 권위 쟁탈전이기도 하지 않나 싶다.

 

    관객이 배우를 목적으로 보러 간다고 해서 의미 창출이 이뤄지지 않는가? 혹은, 관객이 정말 "알맹이 없는" 공연을 보았다고 해서 정말 그 공연의 알맹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관객이 그 알맹이를 창출해낼 수 있지 않나? 이런 점에서 보면 관객의 관극 행위는 다만 내면에서 이뤄질 뿐 재현의 일종인 연극을 내면에서 재-재현하는 흥미로운 작업이지 않을까? 관객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기에, 관극 행위는 찰나의 재현에서 창출되는 다원적 쓰기 작업으로 읽어볼 수 있지 않나? (이런 면에서 <월간 이선좌>는 흥미로운 작업이었음.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내는 쓰기 작업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언제까지 엘리트주의적인 시선에서 관객을 계도해야 하는 대상 혹은 2030 여성이라는 하나의 집단 대상으로 볼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토론에 참여했었다.


    흥미로운 건, 공연 취향과 토론자의 배경, 작업에 따라 정말 시선이 많이 달랐다는 것. 나도 내가 한국 연뮤계의 관객으로서 지냈던 기간이 길어 위 단락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코멘트는 아직 연극 자체의 "변화적인 힘"을 믿고 싶다는 친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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