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uebird Oct 30. 2022

성실한 허무주의자

프롤로그

  지독히도 성실한 허무주의자. 요 몇 년 저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치열한지도 모르고 살았던 10대, 20대. 가족을 떠나보내면서 작게 솟아오른 허무함, 공허함의 시작.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세계를 누비는 전문직 여성을 꿈꿨으나 백오피스만 9년째. ‘그래, 나는 일과 삶의 균형이 좋았던 거야.’ 다양한 취미를 경험해보지만 남아 있는 건 채워지지 않는 마음과 10년째 하는 진로 고민. 생각 많고, 가끔은 해탈에 가까울 정도로 생각 없는 내면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도 성실합니다. 학창 시절에 결석은 1년에 한 번 열 감기에 걸렸던 날이 아니고서야 상상할 수도 없고요, 흥미가 없던 전공이지만 대학교 때에도 수업은 빠진 적 없어요. 휴학도 없이 바로 취업해 회사 다니며 춤, 필라테스, 글쓰기 등 운동과 취미 생활을 꾸준히 하고, 어제는 전화 영어까지 시작했어요. 스스로 허무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렇게 성실해도 되는 건가? 가끔 정체성에 혼란이 옵니다. 

  정반합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네이버 두산백과에서는 헤겔에 의하여 정식화된 변증법 논리의 삼 단계라는데 이런 어려운 정의를 논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계속되는 비슷한 고민에 지쳤을 즈음 우연히 이 말을 보게 되었는데 문득 제 삶의 모습이 정반합을 반복하는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이라는 건 계속 유지되어 오던 상태이고, 이 ‘정’을 부정하며 새로운 상태를 제시하는 것을 ‘반’이라 한답니다. ‘반’은 ‘정’을 극복하였다고 하나 모순적 면모를 지니기에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한 ‘합’이 되지요. 하지만, ‘합’ 또한 완벽할 순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합’이 다시 ‘정’이 되고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합니다. 저는 거창한 진리를 찾지는 않지만, 제 마음이 어떤지 늘 궁금하고 더 행복하기를 바라죠. 성실하기만 했던 저의 ‘정’의 모습이 일련의 일들, 특히 어머니의 부재를 온몸으로 느끼며 허무함이 밀려오는 ‘반’의 형태로 전환됩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것에 지독히 성실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도 한 허무주의에 빠진 모습은 참 모순이죠. 놀랍게도 정반합의 논리처럼 제 마음속에서는 이 두 가지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후회는 싫으니 무엇이든 하는 동안 성실히 하되 나를 해칠만큼의 맹목적으로 가져야 할 것은 없다 여기게 되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삶이 명쾌하지는 않습니다. 늘 무언가 불안하고 불만족스럽죠. 하지만 이 고민을 시작하던 저와는 비슷한 듯 달라져 있습니다. 계속 저는 겁 많고 용기가 없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없는 저만의 진보가 있었으니까요. 분명 지금의 고민은 그때와는 다릅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뎌 달라진 공기를 마시고 있지요. 이렇게 걸음을 내딛다 보면 어느 날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찾았다고 좋아할 수도, 계속해서 찾지 못하고 걸음만 내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치열한 정반합의 과정이 헛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시련이 왔을 때 덜 무너지게 해주는 단단한 내면으로 자리할 테니까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혼란스러운 과정 중에 있다면 우선 함께 하는 전우가 여기 있음을 크게 소리쳐 알려주고 싶어요. 때론 외롭고 지겹고 지치기도 하겠지만, 그러면 그런대로 감정을 흘려보내고 저만의, 당신만의 ‘합’을 만드는 중임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