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받치는 헌사
모두 다 끝이 났습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습니다. 백일이 조금 못 미치는 듯하네요. 그 여정 끝에 저는 엄마를 그녀의 어머니 아버지 곁에 묻어드리고 왔습니다. 울기도 많이 울고 슬프기도 참으로 슬펐습니다. 근데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제 이야기가 아닌 거 같았어요. 모두가 엄마가 쓰시던 이불, 입으시던 옷들 다 정리하라고 하대요. 죽은 사람 물건 오래 가지고 있어 봤자 좋을 거 없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럽니까. 그 죽은 사람이 우리 엄마인데요. 한동안 그 이불속에 파묻혀 볼을 비비고, 옷들을 걸쳐보며 엄마의 체취를 느꼈습니다. 그리웠거든요. 금방이라도 다시 방으로 들어오실 것 같았어요. 이내 옅어지는 체취만큼 저도 차분해졌을 때, 이불도 정리하고 옷도 정리했어요. 그리고는 엄마의 낡은 서랍장을 열어봤어요.
엄마의 대학교 입학증, 젊은 날의 증명사진, 이력서가 있었습니다. 이력서를 읽고 자랑스럽고 창피하고 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력서에는 저보다 더 열심히 산 서른 살의 청년이 있었거든요. 우리 엄마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요. 한 번 들어주세요. 일어일문학 전공한 우리 엄마, 대학교 때 장학금 받고 국가장학생으로 일본 연수까지 다녀오셨고요. 졸업하고는 바로 일본계 회사에 취업해서 일하시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신 이 여성이 바로 우리 엄마예요. 제가 어렸을 때 꿈꾸던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 그게 바로 우리 엄마더라고요. 성실하고 근면함에 진취적이기까지 한 그 이력서 앞에 나는 너무 부끄러웠어요. 나는 대학교도 적당히 갔고, 취업도 적당히 했고, 지금까지 말로만 이직을 외치면서 딱히 노력은 하지 않고 아주 적당히 고만고만하게 살아왔거든요. 엄마가 저를 키우느라 일을 다 놓고 전업주부로만 사신 거 그게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시대는 다 그랬다고 하지만 안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그래서 그러기엔 너무 출중한 사람이잖아요. 실은요 제가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다음에는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날게. 고생 많았어. 고마워. 사랑해.”에요. 정말로 그래요. 꼭 한 번 내가 엄마의 엄마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면 아마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것보다는 훨씬 못 해줄 거 같아요. 그래도 꼭 엄마한테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들이 세 가지 있어요.
하나, 우리 엄마 학교 다니면서 따뜻한 집밥 든든하게 드시게 하고 싶어요. 경상북도 예천에서 양복 장사로 자수성가하신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 열네 살에 서울 유학길에 오르셨대요. 할아버지가 생활비도 넉넉히 주셨다는데 친척 집에서 눈칫밥 드셨다는 게 마음이 너무 미어지더라고요. 예천에 계신 부모님께는 마음 아프실까 제대로 말도 못 했을 거 아니에요. 용돈은 넉넉해서 매일 해물 든 짬뽕 사드셨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더 마음이 아팠어요. 우리 엄마 좋아하는 나물 반찬, 생선구이, 국/찌개, 잡곡밥으로 매일 아침, 저녁 챙겨줄 거예요. 그리고 그 앞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거예요. 물론 쉽지 않겠죠. 저는 회사 다니면서 내 밥 챙겨 먹기 귀찮아서 사 먹을 때 많은걸요. 밥 차리고 치우고 하는 게 일이더라고요. 우리 엄마가 나 학교 다닐 때 매일 아침 나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나셔서 따뜻한 국에 밥에 한 상 차려주신 게 얼마나 큰 사랑인지 이제는 알아요. 그 사랑 엄마도 알게 해주고 싶어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차려주고, 같이 먹는 ‘집밥’의 기억이 어른이 돼서도 나를 지탱하는 탄탄한 흙이 된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나만 알기엔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둘, 우리 엄마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싶은 거 힘닿는 데까지 하게 해 줄 거예요. 수학 때문에 재수했다고, 수학 때문에 간신히 대학교 갔다고 하신 엄마. 그래도 문과 공부는 적성에 맞으셨는지 대학교 들어와서 훨훨 날던 공부 아주 잘하는 우리 엄마. 자식 낳고 애 키우면서 ‘이주희’로서의 삶이 ‘엄마’로의 삶이 되어버렸네요. 많이 미안해요. 그래서 나에게 “살면서 사랑에 빠지겠지만 결혼보다, 자식보다 내가 먼저이고, 일이 있어야 한다. 내가 돈 벌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해주셨을까요. 아마도 그건 지난 세월 보내온 자신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었겠죠. 많이 답답하셨을 거예요. 활동적인 분이 애 둘 낳아 키우느라 집에만 있고, 아빠는 출장이 잦으셨고,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니 요즘 말로 ‘독박 육아’ 아니었을까요. 육아마저 서적 보고 품이 많이 들어도 정석대로 하는 모범생. 일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어는 감을 놓으면 안 된다며 NHK 뉴스 틀어놓고 일본어 원서 읽던 엄마. 나중에 대학원 다니고 싶다던 우리 엄마. 그래서 내가 우리 엄마의 엄마로 산다면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시켜주고 싶어요. 학사, 석사, 박사까지 다 지원해주고, 전공도 여러 개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할 거예요. 뭐든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모범생 스타일의 엄마가 ‘이주희’로서의 삶을 사는 걸 곁에서 지켜보고 응원하고 싶어요. 엄마가 나에게 공부하라는 말이 이 마음이었을까요.
셋, 늘 엄마 옆에 있어 주고 싶어요. 우리 엄마 외로운 사람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자식들만큼은 교육 잘해보시겠다고 중학교 때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대요. 서울 와서 친척 집에서 지내느라 청소년기에 부모님과 함께 산 시간이 부족해요. 그래서인지 엄마는 자기 커리어를 포기해서라도 늘 언니와 저의 옆에 있어 주셨어요. 집 앞에 유치원 아침마다 손잡고 데려다주셨고요. 학교 다닐 때는 비 오는 날 우산 없으면 학교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하면 우산 들고 마중 나와 주셨고요. 체육복, 소고 등 깜빡한 준비물도 전화하면 한마디 하시면서도 집에서 챙겨서 학교 앞에서 건네주셨어요. 엄마는 번거로우셨겠지만 지금 저는 그 기억 하나하나로 엄마의 사랑을 흠뻑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요. 제가 우리 엄마의 엄마로 산다면, 우리 딸 학창 시절을 옆에서 지켜볼 거예요. 함께하는 하루하루를 일기로 남기고 싶어요. 그리고 손글씨 메모도 자주 주고받을 거고요. 사랑한다는 말도 아주 많이 해줄 거예요. 외로움 따위 느낄 새 없이요. 결혼도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장기 출장이 잦지 않고, 사랑 표현 많이 해주는 사위 만나게 기도할 거예요. 그리고 ‘친정’으로서 언제나 든든하게 옆을 지키는 그런 엄마가 될 거예요. 살다가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칭얼거릴 수 있는 그럼 엄마요. 그런 존재 한 명이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는 큰 힘이 되기도 하니까요.
내가 엄마의 엄마로 산다면 해주고 싶은 게 정말 많지만, 그냥 그녀에게 사랑 많이 주고 싶고 모든 행보를 응원하고 언제나 절대적으로 지지해주고 싶어요.
아, 이게 엄마가 날 바라보던 마음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