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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bird Oct 30. 2022

1cm만 고개를 돌려보자

나의 궤도를 바꿀 1cm

  “거기 누구 없나요?”

  퇴근 시간을 10분가량 넘긴 금요일 저녁. 부사장님께서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을 찾고 계셨다. 저녁에 친구들과 생일 파티가 있어 얼른 메일 하나만 보내고 퇴근하려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사장님, 옆 팀 팀장님, 또래 팀원, 그리고 나. 우리는 부사장님께서 가리킨 곳으로 모였다. 그곳엔 부장님이 하얘진 얼굴로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책상에 엎드려 계셨다. 우리가 부르는 소리에도 미동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의식을 잃은 듯했다.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다 일단 119를 불렀다. 중요한 회사 일정이 있던 사장님, 부사장님께서는 경과를 알려달라며 옆 팀 팀장님에게 부탁과 함께 자리를 뜨셨다. 119 구급대원이 올 무렵 다행히 부장님 의식이 돌아와 대화가 가능했다. 구급차에 부장님을 싣고 간 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퇴근 준비를 하는데 다른 직원이 휴지를 잔뜩 들고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부장님이 앉았던 의자에서 피가 계속 묻어 나온다는 것이다. 매시 소재의 의자였기에 하혈이 상당히 있었다는 걸 깨달은 우리는 구급대원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혈이 있으니 구급차에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어 남자인 팀장님보다는 부장님과 같은 여성인 내가 보호자로 함께 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판단하여 부리나케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이 과정이 불과 삼십여 분 만에 정신없이 진행되었고, 응급실로 가는 내내 휴지에 묻은 피가 잔상으로 남아 정신을 차리고자 심호흡을 계속했다.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마주한 건 다른 환자가 내뱉는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연거푸 놀란 가슴을 토닥토닥 진정시키며 부장님의 친 보호자가 오기 전까지 응급실에서 대기하다 집으로 귀환했다.

  주말에 부장님께 고맙다는 전화를 주셨다. 여러 검사 중이며 지금은 괜찮다고, 고생했고 고맙다는 이야기에 다행히 일단락된 듯했으나, 나에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이 주말 내내 나를 힘들게 했다. 최근 1~2년 사이에 회사에는 아픈 사람이 많았다. 내가 살면서 직접 본 최고 스펙의 보유자였던 40대 후반의 직원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다녀오기도 했다. 장례식장에서 뵌 그의 어머니께서는 착하고 똑똑했던 아들이 먼저 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커 보이셨다. 병원에 급하게 입원하기 전에 몸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았던 것을 언급하시며 그동안 출근 전에 가래를 한 움큼 내뱉고 출근했다고 하셨다. 다른 40대 초반의 직원은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하며 병가에 들어갔고, 며칠 전 40대 후반의 부장님께서 회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걸 연달아 겪고 나니 허탈함과 허무함에 잠겼다. 치열하고, 쟁취하고, 인정받고 그런 것이 내가 아프고 나면 다 무슨 소용인가.

  한편, 지난겨울 같은 팀에서 친하게 일하던 한 살 많은 동료 직원은 서울의 삶을 포기하고 근교에서 집 짓고 살겠다며 퇴사했다. 또래의 다른 직원도 너무 마음이 힘들다며 휴식을 찾아 경기도 근교로 이사를 하며 퇴사했다. 가깝게 지냈던 동료들이 치열한 회사원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쉼을 택하는 모습 또한 나의 허무함을 증폭시켰다. 지금 나의 일상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는 내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기에 언제 어떻게 될지라도 지금의 일상을 지낼 거냐고 묻는다면 단연 아니오 였으니까. 가랑비처럼 밀려든 생각은 어느새 내 턱까지 가득 차 우울감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이 자각이 들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련의 일들로 나에게 중요한 생각이 들었음은 맞으나, 허무주의로 빠져서는 안 되겠다. 반추해봄은 좋으나, 허무함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최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 일상의 최소한을 지키는 선에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고민해보는 귀한 시간으로 보내자. 어느 것도 나를 가둘 수 없으니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하는 전환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도 유지하고 건강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절실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밥 먹으면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으니까. 춤과 필라테스 등 즐길 수 있는 운동들로 체력을 가꾸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하고 더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나 피곤함은 비슷하고 오히려 더 정신은 맑아짐을 느꼈다.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조금 튼 궤도를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길에서 나의 새로운 삶의 방향이 보일 것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이 작은 걸음이 1년 후, 3년 후, 10년 후에는 전혀 다른 궤도를 걷는 나를 발견하게 해 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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