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가 자주 가던 책방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나는 사실 그때 공자를 처음 만났다. 그때가 97년도인가 96년도인가 가물가물하다. 유리가면이라는 1976년도에 시작되어 아직도 미완결된 만화에 심취해 있었고 아마 그때쯤 그 책을 빌리러 갔었던 것 같다. 그때 대여점 순위에 있던 책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었는데 왜 저분이 죽어야 나라가 살까 싶은 그런 호기심에 빌렸지만, 초등학생이 읽기엔 너무나 어려워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도덕시간에 열성적인 선생님을 만나 공자와 제대로 만나봤지만 그의 인물됨됨이에 대해서라기보다 동양철학에 한 획을 그은 분 정도로만 기억이 남는다. 그러나 요즘 자주자주 그분을 만난다. 거진 인생의 중반부의 시작쯤에 오니 그와 만날 기회가 빈번해졌다. 서른이나 마흔을 준비하는 책들은 한 번쯤 그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가 너무나도 유명한 이립, 불혹 하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사실 이립과, 불혹은 각각 두 음절로 된 단어이지만 요즘은 뜻을 세우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게 어떤 것일까 싶어 고민한다. 생각이 말처럼 되지 않는데 저 말을 남긴 공자라는 분은 과연 흔들리지 않기에 가능했던 거 아닐까. 성인이자 학자였던 대단한 분이라는 칭호가 주어진 것은 헛투르 될이 없다. 더불어 저 글자 한글자 한글자에 공자라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담아 썼을까 그런 생각. 더불어 흔들리지 않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생각한다. 나는 매일같이 뜻도 세우지 못하고 흔들리기 일수니까.
오늘은 날이 추우니 운동은 내일 갑시다. 하고 나를 설득하고 되도록 편한쪽으로 일신을 뉘이며 전기장판 켜놓은 침대로 들어가 굴처럼 이불을 덮는다. 30초 단위로 나를 격하게 흔들어줄 쇼츠로 빠져든다. 이렇게 정신없이 흔들리는데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냐고. 그러다 저울의 한쪽이 무거워진 사람처럼 갑자기 몸을 벌떡일으켜 운동가방을 챙겨 문밖으로 나선다. 그때쯤에는 질문이 약간의 투절댐으로 바뀌어 이렇게 찰나에도 어떻게 혹하지 않을 수 있냐고 같은 질문을 끊임 없이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다.
운동 하는 곳은 여성 전용 헬스장인데 연령층이 다양하다. 2030에다가 40대, 50대도 있고 60대도 있다. 다들 추운데 나와서 운동을 하는데 입구 앞이 왁자지껄하다. 오늘 너무 추워, 올겨울 들어 제일 춥대. 그런 말들이 오간다. 운동 해야지. 한거 안한거랑 또 달라. 그런 대화들. 일상적인 대화들이 오가는 것을 팔 근육이 펌핑되는걸 느끼며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공자를 생각 한다.
불혹까지는 나도 흔들렸다니까. 불혹을 쓰면서도 그랬고, 불혹을 쓰고나서도 이 말이 맞나 싶었다니까, 그래.
불혹, 아주 멀고 멀게만 느껴졌던 공자의 그 말이 친숙하고 친숙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