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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스 Nov 24. 2022

[영화 보고 끄적이기] 이옥섭의 『메기』를 보고

믿음과 의심, 이중성과 관계성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믿음과 의심을 하나만 떼어놓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론 의심이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로 이어지고 믿음이 사라지면 의심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이 둘의 굴레를 단순히 좋음과 좋지 않음으로 단정 짓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메기』는 믿음과 의심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믿음은 사람을 연결하는 데 없어선 안 될 요소다. 즉, 세상에 나 이외의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믿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연결 짓는다.

그러나 의심. 과연 없어선 안 될 요소일까. 작중 의심은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성원과 함께 일하는 동생)가 되어 관계에 금이 가게도 하며, 진실을 밝힘(성원과 윤영)으로써 끊어야 할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믿음. 믿음은 의심을 해소했을 때 생기기도 하며(부원장과 윤영이 출근하지 않은 직원의 집에 찾아가 실제로 아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의심 뒤에 다져진 믿음은 굳건해지기도 한다.(윤영과 부원장)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대요. 사실은 언제나 사실과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만들어진다고 아빠가 그랬어요"

이처럼 영화에선 믿음과 의심의 이중성과 관계성을 보여줌으로써 절대적이고 획일적인 믿음과 의심은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의심이 생기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영화에서 부풀어 오르는 의심의 원천은 찾기 어렵다. 의심은 두려움으로 비롯된 상상일 수도, 상상으로부터 비롯된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단 두 경우만 봐도 작중 인과관계를 명확히 하기란 곤란하다.

성원의 전 여자친구인 지연이 윤영에게 '성원과 만나던 때 맞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윤영은 성원의 모르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곧 윤영에게 '성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라는 두려움을 주지 않았을 테며, 관계의 종말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두려움과 상상. 여기서 두 단어의 위치는 아무리 바뀌어도 어색하지 않다. 의심과 믿음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앞섰든, 온전히 한 가지에 치우치지 않는다. 윤영이 지연을 믿었기에 성원을 의심한 것이 아니며, 성원을 믿지 않았기에 성원에게 맞았다는 지연을 의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행위보다, 믿음과 의심을 따로 나누지 않던 생활에 던져진 돌멩이가 일으킨 파동이 어떤 물결을 이는지 가늠하는 행위가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윤영은 서투르지만 결국 해냈다. 성원에게 전 여자친구를 때린 적이 있다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 윤영은 의심에 머물렀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고자 하는 용기가 윤영에겐 있었다. 시간의 텀이 있었지만 윤영은 성원을 직접 만나 대답을 들었고, 성원이 빠진 싱크홀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본다.

"너도 혹시 뭔가를 부풀리고 있다고 생각되면 혹은 생각하면 엄청 큰 바늘로 찔러주고 싶다. 안 아프게."

『메기』에선 이처럼 진실을 마주할 때 마음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싱크홀을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냈다. 싱크홀은 누군가에겐 재난이 되지만 성원에겐 일자리를 주는 희망이다. 희망이었던 싱크홀이 성원에게도 재난이 되는 모습은 의심, 믿음,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나 희망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언제나 비극이 되지도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 성원만이 아닌, 누구나 희망과 비극의 굴레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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