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를 쓰거나 떠올릴 때 각 단어에 나름대로의 감정이 스며들어 간다. 예를 들어 ‘곁’이라는 단어를 쓸 때 따뜻한 감정을 상상한다거나 ‘척’이라고 할 때 아니꼬운 감정이 딸려오는 것이다. 단어와 감정의 연결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것이다. 나에게 있어 ‘벨소리’라는 단어는 감정의 여러 스펙트럼 중 ‘무서움’에 가까운 단어다. 벨소리와 관련된 어떠한 주기적인 사건도, 강렬한 기억도 없지만 그냥, 그렇게 됐다.
‘벨소리’와 관련된 유일한 기억을 꺼내자면 초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그날은 비가 아주 많이 내려서 오후 3-4시쯤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집안이 어둑어둑했다. 나와 동생은 일을 나가신 부모님을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TV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등과 TV가 꺼졌고 집안이 한순간에 깜깜하게 변했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천둥이 치는 창밖의 풍경이 더 밝았을 정도였다. 나와 동생은 정전에 너무 놀라서 소파 위에서 잠시 굳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TV 옆에 있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벨소리에 동생은 울기 시작했고, 나는 정전 속에서 전화가 울린다는 사실 자체에 공포를 느꼈다. 그 공간에서 전화를 받을 사람도 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무서웠다. 밖의 천둥소리, 동생의 울음소리, 눈앞의 전화벨소리. 그 소리들은 여기저기서 나를 찌르며 나를 압박했다. 결국 용기를 내어 소파를 벗어나려고 할 때쯤 전등과 TV에 다시 전기가 들어왔고, 전화는 끊겼다. 아직도 어떻게 전화가 울릴 수 있었는지, 누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지 모르겠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꽤 강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단어 자체는 대부분 가치 중립적이다. 단어가 각자에게 다른 의미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 단어와 연결된 각자의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강할 수도, 사소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는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감상하는 매력적인 문학 장르라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브랜딩의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브랜드의 이름이 대중들에게 직관적으로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브랜드와 관련된 좋은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 기억은 브랜드 매장에 갔다가 직원의 미소가 따뜻했다는 사소한 기억일 수도 있고, 브랜드의 이벤트에 당첨되었다거나 브랜드의 제품을 누군가에게 선물했는데 상대가 굉장히 행복해했던 기억일 수도 있다. 단어만 봐도 그냥 미소가 나올 수 있도록 작은 행복한 기억을 만드는 것이 어려우면서도 가장 강력한 마케팅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