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15~16.
일찍은 개뿔. 둘 다 늦잠 잤다. 아홉 시에 일어나 빈둥댔다.
커피라도 한 잔 할까? 빵이랑.
좋지.
커피를 먹으러 내려간 곳은 카페가 아니라 식당이었다. 조식뷔페 요금은 32불. 굳이 뷔페까지 먹을 생각은 아니었어서, 단품 메뉴를 보니 커피가 10불에 빵은 아예 팔지도 않는다. 이럴 바엔 그냥 뷔페를 먹기로.
진아. 누들 맛 어때?
야. 이거 완전 오징어 짬뽕 맛이야. 똑같애.
오짬? 엄청 맛있다는 거네?
그렇지. 완전 우리 입맛이지.
뷔페 음식이 가짓수는 많지 않음에도 종류가 다양했다. 아시아 중동 구미의 음식이 골고루여서, 세계 어디서 왔든 입에 맞는 음식이 하나쯤은 있을 정도다. 우리에겐 누들이 그랬다. 국물이 완전 농심 오징어짬뽕 맛 그대로. 심지어 고명 중엔 볶음김치도 있었다. 밥까지 말아 두 번 먹었다. 그 외에도 딤섬 베이컨 시리얼 과일 주스 요거트 등등 여러 접시를 배부르도록 먹었다. 실제 지불한 비용은 서비스 요금과 세금을 포함해서 인당 38불이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게 다 오징어짬뽕 덕분이다.
체크아웃. 호텔 로비에 캐리어를 맡기고 나왔다. 오늘 일정은 미정. 원래는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가기로 했다가, 여긴 너무 작아 별로 볼 것도 없으니 나중에 오사카에서 제대로 가보는 걸로 했다가, 가만 보니 오후 시간도 애매한데 클룩으로 할인받아 슬쩍 다녀올까 했다가, 일단 리조트 월드 센토사의 호텔에 가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래. 자고로 여행은 즉흥성이지.
더웠다. 옷이 금세 젖었다. 다행히 호텔은 멀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서 잠시 쉬었다. 아직도 어디에 갈지 정하지 못했다. 목적 없이 거닐다가 카지노를 발견했다. 팡은 최근 드라마 카지노를 너무 재밌게 보았단다.
여기 카지노가 특이한 게, 내국인도 이용 가능하대. 대신 입장료가 100달러래.
그럼 외국인은?
외국인은 당연히 무료지.
무료야? 그럼 가야지. 100달러 버는 거네.
단지 내국인은 유료라는 이유만으로 카지노에 입장한 우리. 하라는 도박은 안 하고 대신 카지노를 관찰 분석했다. 팡은 카지노에서 고객들이 더 많은 돈을 쓰게 만드는 행동학적 요인들을 관찰했고, 나는 카지노의 도박들이 수학적으로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분석했다. 도파민 분비와 역치 상승의 진화생물학까지. 도박보다 이러고 노는 게 더 재미있어서, 우리는 돈 한 푼 쓰지 않고 카지노를 즐겼다. 에어컨 빵빵하고 커피 차 주스 탄산 무료로 제공되니 이만한 곳이 없었다.
보통 카지노는 고객들이 오래 머물면서 계속 도박을 해야 돈을 더 벌기 때문에, 숙박이나 식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경우가 많아. 여기는 음료만 무료지만 라스베가스 같은 경우 아예 술까지 공짜로 주더라고. 봐바 이 식당도, 센토사 치고 싸지 않아?
그러네. 근데 genting dollar는 뭐지?
식당 메뉴판에 가격이 두 종류로 표기되어 있어 궁금증을 자아냈다. 팡이 먼저 가설을 제시했다.
이거… 여기 게임 칩 말하는 거 아니야? 현금을 칩으로 교환하는 것을 유도하기 위해, 식비도 현금보단 칩으로 지불하면 좀 더 싸게 해주는 거지. 그렇게 교환하면서 남은 칩들은 어차피 여기서 도박으로 다 쓰고 나갈 테니까?
…?! 천잰데?!
팡은 멘사 출신이다. 점심을 저렴하게 먹기 위해 30달러만 칩으로 교환했다. 5달러짜리 칩 여섯 개를 들고 다시 식당으로 향한 우리. 바쿠테와 미트 플래터를 주문하며 자신 있게 할인된 가격만큼의 칩을 내밀었는데… 아니었다.
이거 genting dollar 아니에요?(영어)
아니에요. 혹시 멤버십 카드 있으세요?(영어)
아뇨. 없어요.(영어)
그럼 현금 결제 하셔야 해요.(영어)
기대한 할인을 받지 못한 것 보다도, 가설이 틀린 것 때문에 우리는 잠시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시무룩은 잠시. 음식 맛이 좋아서 또 금방 신이 났다. 즐거울 준비만 되어 있으면, 작은 자극에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은 습관이다.
어쨌든 30 골드의 칩이 남았네. 진아. 어떡할까.
현명하게는 그걸 다시 현금화하는 방법도 있지. 수수료도 발생하지 않잖아? 근데 뭐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 재미 삼아 쓰고 가도 되지.
ㅋㅋㅋ 딱 30 골드만 해볼까? 갈 땐 비즈니스 타야지!
ㅋㅋㅋㅋㅋ 아 이거 칩을 갖고 있으니 없던 욕심이 절로 생기는구만?
우리는 칩을 갖고 룰렛머신 앞에 앉았다. 그런데 베팅을 하려고 보니 칩을 넣는 곳이 없었다. 오직 현금 혹은 멤버십 카드. 아니 그러면 칩은 어떻게 쓰나? 알고 보니 칩은 딜러가 있는 전통식 테이블에서만 쓰는 거였다. 딜러와 대면하며 베팅하기엔 너무 쪼렙인 우리는 결국 칩을 다시 현금으로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현금으로도 게임을 할 수 있어서, 우리의 가설은 애초에 틀렸다.
어? 다시 현금이 되었네? 팡 어떻게, 게임할 거야?
해야지! ㅋㅋㅋㅋ 비즈니스 타야지!
미니멈 베팅 5달러. 팡은 그때 그때 촉에 따라 베팅했다. 더도 아니고 딱 5달러씩만. 사실 전략을 세우고 말고 할 게 없는 게임이다. 운 100%. 나는 옆에서 구경했다. 처음엔 운 좋게 좀 따기도 했지만, 계속하다 보니 결국 다 잃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팡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진아. 우리 아까 100달러씩 나눠 갖지 않았어? 그거 갖고 있지?
음? 무슨 소리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있지도 않던 일을 이야기해서 당황하는 나를 보며 팡은 더더욱 당황했다.
아 내가 왜 이러지? 도박 때문에 순간 정신을 잃었나?
ㅋㅋㅋㅋㅋㅋ 팡아 너 지금 멘탈 나간 거 같아. 이제 그만하고 나가자.
여행지에서의 한 나절을 카지노에서 보냈다. 이 모든 게 내국인은 입장료 100달러를 내야 들어갈 수 있대서 시작된 일. 그래도 큰돈 안 쓰고 싸게 잘 놀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유니버셜 스튜디오 어떻게 생겼는지는 가 봐야지?
그래 그 앞까지만이라도 가보자.
문 밖에서 구경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자전하는 지구본이 문 밖에 있었다. 이 지구본이야말로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핵심 컨텐츠 아닌가? 지구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늘 할 일 다 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찾았다. 센토사 익스프레스를 타고 본토로. 비보시티와 하버프론트를 구경했다. 토스트박스에서 카야토스트를 먹었다. 단짠단짠 맛은 좋은데 먹기가 좀 불편했다. 마트에서 칠리크랩맛 라면을 샀다.
택시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탑승 수속 마치고 면세점을 구경했다.
팡아. 조금 출출하지 않냐? 밥 어떡하지.
당연히 먹어야지. 타기 전에 든든히 먹어둬야 돼. 비행시간은 길고, 알다시피 우리 비행기는 밥이 안 나와.
푸드코트에서 쌀국수, 완탕, 창펀을 시켰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세팅하고, 손을 닦기 위해 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내는데.. 이런 반전이 있나. 100달러 지폐가 나왔다.
팡. 대반전.
뭔데?
나한테 100달러 지폐가.. 있었네? 아놔 이거 언제 나눴냐 ㅋㅋㅋㅋ
뭐야. 내가 맞았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까 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아까는 왜 바로 수긍한 거야 ㅋㅋ 너도 확신이 없더만.
그러게. 내가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었나 봐. 도박에 눈이 팔려 정신 못 차릴까 봐.
어쨌든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다. 이거 그럼 어떻게 쓸까?
술을 한 병 더 사지 뭐. 그래서 새 거 하나씩 가져가고, 여행 중 마시던 술은 a4랑 나눠 마시자.
천잰데?!
똑똑한 팡이 돌아왔다. 팡은 멘사 출신이다.
30분 연착으로 새벽 2시가 다 되어 탑승했다. 팡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잠들었다. 나도 이륙까지 못 버티고 잤다. 자다 깨고 자다 깨고 자다 깨니 착륙. 긴 비행시간 어찌 버티나 했는데, 피로가 수면제였다.
나갈 땐 외국 나가서 좋고, 들어올 땐 한국 들어와서 좋다니깐.
그치. 나도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야.
오전 9시 45분, 공항 도착. 인천 날씨는 11도. 쌀쌀하다. 공항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공항 직원들이 모국어로 말을 한다. 고국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