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11.
9시.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조식을 먹을 수 있다. 서로를 깨워 내려갔다.
어제 못 먹은 음식들이 좀 있었다. 한식코너의 떡볶이와 한국카레가 입에 맞았다. 어제 먹은 국수와 요플레를 오늘도 먹었다. 팡이 요플레 뚜껑을 핥지 않고 버리길래 나도 그리 하였다. 과일을 종류별로 먹었다. 망고가 더 이상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밥 먹고 켠팡은 탁구 리턴매치를 했다. 이번에도 팡 승리. 배드민턴도 쳤는데 또 팡이 이겼다. 활도 쐈다. 이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다 같이 못 쐈다. 여기 참 재밌는 거 많다.
올라와서 씻었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먹고 남은 망고 갈비가 흉악하게 쌓여있었다.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오늘 체크아웃. 씻고 짐을 쌌다. 냉장고의 과일을 아무도 가져가려 하지 않길래 내 캐리어에 다 넣었다. 지금은 질렸을지언정 분명 내일 되면 다시 생각나리라.
로비에 앉아 숙소를 구했다. 당장 오늘 묵을 숙소를 구해야 했다. 그전에 이동부터가 문제였다. 모알보알로 가는 택시가 영 잡히지 않았다. 고심 끝에 팡이 말했다.
두 가지 방안이 있어. 첫 번째는 그냥 이 근처 다른 리조트 잡고 계속 휴양하다 가는 거야. 지금까지 그랬듯이. 두 번째는 캐리어를 여기에 맡겨 두고, 배낭에 수영할 짐만 가볍게 챙겨서 버스를 타고 모알보알에 다녀오는 거야. 어떻게 할까?
음.. 택시가 안 잡혀서 그러는 거지? 어제 탔던 택시에 연락을 해보는 건 어때?
글쎄.. 그 택시는 잡혀봤자 어차피 차가 작아서 캐리어 못 실을걸.
두 가지 방안이 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또 마땅히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때 마침 켠이 해결책을 가져왔다. 호텔 측에 문의하여 5,000페소에 모알보알까지 우릴 태워줄 밴을 구한 것. 켠 한 건 해따!
밴은 컸다. 우리 캐리어를 다 넣고도 자리가 남았다.
기사님이 유머감각이 있어 좋았다. 이름은 로날드. 자식이 다섯이라 열심히 살아야 한단다. 나이가 몇인가 물어봤더니 91년생이었다. 서른넷에 아이 다섯이라. 어휴. 갑자기 대단해 보였다. 한참 대화를 나눈 다음 로날드는 팡의 영어를 칭찬했다. 우리는 로날드에게 팡이 우리의 리더라고 말했다.
모알보알까지는 밟아도 세 시간. 도중에 점심시간이 되어 졸리비에 들렀다. 맥도널드를 압도한다는 필리핀 토종 브랜드라니 한 번은 먹어봐야지. 그런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30분이 지나도록 깜깜무소식. 이것이 필리핀의 만만디인가. 결국 기다리다 못한 로날드가 나서고, 영어를 잘하는 팡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카운터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감튀는 뭐 그냥 감튀. 치즈버거는 아무래도 우리 눈높이엔 좀 모자랐다. 의외로 치킨 스파게티가 맛있었다. 90년대, 특별한 날에 먹던 옛스러운 맛이 났다.
다시 이동. 뒷좌석에서 여행 패키지 포스터를 보던 켠이 슈터 클럽 괜찮냐고 로날드에게 물었다. 로날드는 거기 좋다고,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답했다. 그러자 팡은 진짜냐며, 한국인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고 그 안에서 총을 쏘기 때문에 굳이 여행까지 와서 총을 쏘러 가는 것은 의외라고 이야기했다.(여기까지 영어) 그러더니 팡은 대뜸 한국어로
나 전에 배 커플이랑 같이 오락실 갔다가, 거기서 총 쏜 적 있거든. 근데 진짜 쏘는 족족 다 맞는 거야. 그날 거기 있는 인형 내가 다 따왔잖아. 진짜야. 배한테 물어봐.
팡의 사격 솜씨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팡은 스포츠맨 이미지도 가져가고 싶은 모양이다. 가이드북 지식인에 머무르지 않고 문무를 겸비하려는 팡팡.
차는 구불구불 산길을 달렸다. 세부 와서 산 처음 봤다. 길 옆으로는 인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기 사람들은 도시에 모여 살지 않고 이렇게 흩어져 사나? 조수석에 앉아 유창한 영어로 로날드와 농담을 하던 팡도 어느새 졸고 있었다. 켠도 졸려 보였다. 나도 곧 졸았다.
모알보알 표지판이 나왔다. 그러나 차는 멈추지 않고 아주 깊숙이 들어갔다. 대체 어디까지 가나 싶을 때, 갑자기 멈추었다.
팡. 여기가 맞아?
어. 잠깐만.. 어 여기가 맞네? 블루 오키드.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 주워 먹다 다다를 법한 숲 속에 우두커니 집과 수영장이 있었다. 집도 수영장도 4성급 치고는 초라했다. 혹시나 해서 구글맵을 봤다. 맞다. 여기다. 하긴, 4성급 치고 워낙 싸다 했다.
서양 투숙객이 많았다. 다들 물놀이하러 왔으리. 벽에 붙어있던 비치하우스 룰은 뭔가 서양스러웠다. 미니골프 가격을 살펴보고 있는 나를 팡이 찍었다. 나는 골프 중독이다.
체크인. 숙소가 넓긴 했다. 작은 베드 세 개 큰 베드 하나. 베드가 넘쳐서 자리를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에어컨은 좀 약했다. 모기가 많았다. 뭔가는 좋고 뭔가는 아쉬웠다. 리더 팡은 만족을, 팔로어 켠은 아쉬움을 표했다.
저녁 타임. 현지식을 즐겨보자고 sinigang, coconut curry fish, char kuih teow pork를 시켰다. 시니강은 시큼했다. 코코넛 커리는 코코넛 과자를 물에 탄 맛이었다. 차쿠이터우가 우리 입맛에 맞았다. 순한 떡볶이 느낌. 망고가 싫어졌다는 켠을 위해 망고셰이크를 시키고(?), 팡진은 산미구엘 라이트를 시켰다. 전반적으로 내 입에는 안 맞았지만, 리더에게 투정 부리면 안 되니까 나름 열심히 먹었다. 그동안 모기에 많이 물렸다.
팡 여기 맥주 얼마야?
엄청 싸. 110페소.
오 110 페소면 2750원? 개이득?!
그치? 열 병 마셔 진아.
그렇게 축배를 들려는데 켠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 어차피 한국에서 500ml 네 캔 12000원인데.. 그럼 여기가 더 비싼 거 아니야?
…… 야 이 T발새끼야!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ㅠㅠ 난들 이 리조트가 100% 맘에 들겠는가 ㅠㅠ 330ml 2750원이 500ml 3000원보다 비싼걸 누가 모르나 어차피 열 병 마시지도 못하는데 ㅠㅠ 분위기 처진 것 같아서 띄우려던 건데 ㅠㅠ 어쨌든 저 욕 한마디에 다 같이 웃었다 ㅠㅠ 그거면 됐다 ㅠㅠㅠㅠㅠㅠㅠㅠ
첫 맥주를 다 마시고, 다음 맥주는 레드홀스로 시켰다. Extra strong. 500ml, 6.9도. 팡 표현에 의하면 ‘자동소맥’. 예전에 멋모르고 쭉쭉 마시다 필름이 끊겼었단다. 그럴만하다. 아주 내 스타일이다.
식사는 마쳤지만 음주는 마치지 않았다. 맥주병을 들고 해변을 돌았다. 하트 모양으로 파진 모래언덕이 내겐 그린 벙커로 보였다. 나는 골프 중독이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의 물놀이를 예약했다. 방에서 셋이 술을 기울이며,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 열 시에는 자기로 했다. 잠깐 진지한 토크를 나누다 금세 피곤해졌다. 켠은 9시쯤 잠들었다. 9:21, 나도 눈이 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