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10.
알람에 깼다. 내 코 고는 소리에 못 잤다며 켠이 투덜댔다. 겨우 한 시간 자다가 회사에 장애가 터져서 바로 일어났다고.
아 그래? 피곤하겠다. 그래도 조식은 먹어야 돼. 먹고 와서 자. 그래도 그 와중에 희소식이 있어.
뭔데?
오늘 체크아웃 안 해도 돼.
아싸 개이득.
조식은 훌륭했다. 고기, 국수, 과일주스, 스무디 다 좋았다. 그래 인당 6만 원 짜린데 이 정돈 해야지. 해마 인형을 쓴 사람이 있어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먹다가 켠 장애가 또 터져서, 켠은 식사를 중단해야 했다. 기술자는 고단하다.
다 먹고 올라와서 마저 잤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켠은 계속 일했다. 개발자는 고단하다.
눈을 뜨니 오후 한 시. 켠은 아직도 일을 끝내지 못했다. 일단 밥이라도 먹고 하자며 내려갔다. DIP, 호텔 내에 있는 일식당. 돼지고기와 야채와 롤과 볶음밥에 맥주 두 잔. 맛은 뭐 나쁘진 않았다. 켠에게 멤버십 카드가 있어서 10% DC를 받았다. 여러모로 활약하는 켠.
식후 담타. 드디어 팡에게 담배 동지가 생겼다. 흡연구역 앞에 꽃이 예쁘게 피었다고,
이래야 아재답지
라며 팡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켠은 꽃 사진을 찍는 팡을 찍었다. 여기까진 뭐 사실 별일도 아닌데 켠이
이러면 여행기에 올라가겠지
라고 말하기에 이렇게 올린다. 아재들이 뭐 이렇다. 작은 것에도 의미 부여하고 그런다.
호텔 내의 제과점에서 망고주스와 커피를 사서 숙소로 올라왔다. 망고주스가 너무 맛있어서 어제 사둔 망고를 깎았다. 생망고가 너무 맛있어서,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필리핀의 망고를 찬양했다.
장애는 쉬이 해결되지 않았다. 체력의 한계에 달한 켠은 일단 눈을 붙였다. 그사이 팡진은 씻었다. 다 씻은 뒤 나가려고 켠을 깨웠으나,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둘이 나왔다.
세부시티 까지는 차로 50분 거리. 은근히 먼 거리다. 한번 가는 김에 시티 투어를 충분히 하고 와야 한다. 첫 목적지는 산 페드로 요새. 수백 년 된 낡은 유적지다. 입장료 30페소. 침략자를 막기 위해 원주민이 지었나 했는데, 알고 보니 스페인 상륙자들이 스스로를 원주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은 요새였다. 아기자기하여 거닐기에 좋았다. 2층에서는 주변 광장과 공원이 다 내려다보였다.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그 광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를 보며 갑자기 활짝 웃어주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정작 그 순간은 못 찍었다.
와 애들이 진짜 해맑지 않냐? 우리나라랑 달라. 학원을 안 다녀서 그런가?
가이드북에서 본 건데, 필리핀에서 반드시 봐야 할 것 중에 아이들의 밝은 미소가 있대. 필리핀을 설명하는 키워드에서 미소가 빠질 수 없다나. 그만큼 여기 애들이 순수한 거지.
팡은 모르는 게 없다. 잠시 후엔 컴포트 룸 표지판을 보고는
같은 영어를 쓰더라도 화장실을 지칭하는 단어가 다 다르잖아. 얘네는 toilet이라고 안 하고 comfort room이라고 한대. 그래서 Where is toilet? 하고 물으면 CR is there. 하고 알려준다는 거야. 이런 건 유튜브에는 안 나오지.
역시 진정한 지식은 2019-2020 최신 개정판 가이드북 속에 있다.
요새를 나오면 플라자 인디펜덴시아. 사람들이 모여 운동을 하고, 춤연습을 하고 있었다. 개들이 거리를 자유로이 활보했다. 필리핀 개들에겐 목줄도 입마개도 없다. 여기 개들은 안 무나? 길 한복판에 곤히 잠든 개가 있어 사진을 찍었다. 견생은 한국보다 필리핀이 훨씬 낫다.
다음은 세부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오래된 성당의 운치가 있었다. 마침 미사가 집전중이어서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마젤란의 십자가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걸어 다니니 진짜 ‘여행’하는 느낌이 났다.
이제 어딜 가볼까?
시장 어때. 여기 근처에 있는데.
카본 마켓은 가까웠다. 재래시장답게 활기가 넘쳤다. 과일이 마트보다 훨씬 쌌다. 40페소짜리 코코넛을 하나씩 먹고, 킬로당 110페소 망고와 킬로당 230페소 망고스틴을 각각 2킬로씩 샀다. 그래. 이게 여행이지.
시장 옆에는 푸드코트가 있었다. 더 배럭스 - 카본. 어제 갔던 메르카토보다 훨씬 깔끔하고, 더 활기찼다. 한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팡아 이제 어디 가냐?
IT park 가자. 세부시티의 청담동.
택시를 타고 IT park로 이동했다. 세부시티의 부촌. 건물이 높고 거리가 깨끗했다. 아얄라몰 센트럴블록을 구경하다 픽업커피란 곳에서 매드 망고 라는 음료를 주문했는데 먹어보니 망고주스가 아니라 망고맛 요거트였다.
이 타이밍에 켠이 합류했다. 잠도 자고 장애도 다 처리한 뒤 쌩쌩해져 돌아온 켠.
셋이 함께 향한 곳은 수그보 메르카도. 여기도 푸드코트다. 사람들이 넘쳐났다. 한국인도 많이 보였다. 아기돼지로 만드는 레촌과 곁들임 김치, 일본라멘, 교자, 티본스테이크, 생맥주 세 잔을 시켰다. 레촌은 익숙한 돼지수육맛이었다. 김치는 현지에서 만들었는지 영 아니었다. 라멘은 무난했고 교자는 그저 그랬다. 티본스테이크는 맛있지만 질겼다. 전반적으로 맛있다고 할만한 퀄리티는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워낙 좋아 즐겁게 먹었다.
IT park는 부촌. 밤늦게 걸어도 위험하지 않다. 거리를 배회하다 보스커피를 발견. 필리핀 원두를 쓰는 필리핀 토종 커피 브랜드라나. 아아 한잔씩 때렸다.
다음엔 어딜 갈까?
우린 어디든 좋으니 니 맘대로 해 팡팡.
그러고 보니 우리 오늘 마사지를 안 받았네. 여기선 마사지가 워낙 싸서 받으면 받을수록 돈 버는 거야. 어? 마침 근처에 싸고 잘하는 데 있다. 돈 벌러 가자.
팡이 찾은 마사지샵은 텐더 스파. 오일 마사지 90분에 600페소. 시간당 만원 꼴. 여기도 오아시스 스파만큼 시원했다. 팁 100페소까지 포함해도 17,500원. 한국에서 9만 원 정도 주고받았다 치면 72,500원 번 셈이다. 다들 가벼운 몸이 되어 나왔다.
들어갈까, 한잔 더 할까?
여긴 안전하다며. 지금 들어가긴 아깝지.
좋아 그럼 루프탑 바에서 한 잔 하고 가자.
그렇게 간 바 이름은 Verified. 탁 트인 뷰가 좋았다. 바람이 잘 불어 시원했다. 칵테일 한 잔이 360페소니까 9,000원. 한국에서 25,000원 정도 주고 마셨다 치면 16,000원 벌었다. 오늘 돈 많이 번다.
어느새 새벽 1시. 내려와 택시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바로 올라가기엔 별이 너무 밝아서, 풀사이드 베드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탁구장이 열려있어 켠팡은 탁구를 쳤다. 막상막하. 서울 놈들은 못하는 게 없다. 계단을 올라 객실로 왔다. 언제나처럼 시원한 공기. 역시 집이 최고다.
낮에 산 망고스틴을 먹을 차례. 많이 먹어본 팡이 손질에 나섰다. 한참을 씻더니 걱정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하길
진아. 이거 개미가 많아도 너무 많다. 이거 담았던 니 가방에도 개미 많이 있겠는데?
괜찮아. 뭐 어때.
아니 너 집에 개미 가져갈 수도 있어.
괜찮아. 뭐 어때.
집에 개미 살아도 괜찮아?
응? 얘네 일개미라 어차피 번식 못 해.
아 그런 거야?
켠팡이 개미의 생태를 잘 모르길래 한참 설명해 줬다. 못하는 건 없지만 개미는 모르는 서울 놈들 같으니.
이어서 망고. 팡이 컵으로 살을 발라주어서, 쭈압쭈압 신나게 받아먹었다. 이러다간 당뇨가 오겠다 싶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새벽 네 시. 오늘은 어제보다 더 늦었다. 켠이 먼저 코를 골았다. 팡보다 내가 먼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