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13.
새벽에 깼다. 채광이 너무 좋아 눈이 부셨다. 블라인드를 치고 다시 누웠다. 8시 알람에 다들 일어났다.
조식. 음식 가짓수가 쉐라톤보다 많았다. 한식코너는 어휴, 김치만도 다섯 가지였다. 배추김치 파김치 깍두기 사과김치 백김치. 사과김치는 또 뭐람. 분명 한국에서보다 어설플 걸 알기에 일부러 더 안 먹었다. 세부에서 한식은 도처에 있고, 그래서 더욱 생각나지 않는다.
식사 후 다시 숙소로. 팡은 아래층에 볼일이 있어서 켠진 먼저 올라왔다.
진아. 체크아웃 몇 시야?
글쎄. 모르겠는데? 팡이 알려나?
카운터에 물어보지 뭐.
켠은 주저 않고 카운터에 전화했다. 능숙한 영어로 전화하는 켠. 전화를 끊고는
열두 시래. 드웰 드웰 하길래 무슨 소린가 했더니 twelve였네.
오 그래? 열두 시면 여유 있구만.
나는 맥주를 깠다. 팡이 올라오기 전까지 켠과 텍스트, 컨텍스트, 대화, 소통, 공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팡이 올라오자 켠은 팡에게 물었다.
팡아 너 우리 체크아웃 몇 시인지 알고 있었어?
어 12시.
아는데 왜 말 안 해줬어?
안 물어봤으니까?
켠은 그 대답 옳지 않다며 올바른 대답을 AI에게 물어보길 제안했다. 신선한 제안이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AI의 대답은 매우 따스했다.
그러는 사이 맥주 한 캔을 다 마셨다. 한 캔을 더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아직도 세 캔이 남아있었다. 남은 맥주를 켠에게 권하고 싶었다.
켠아. 너 맥주 한 캔 마셔.
싫은데?
응? 왜 싫어?
싫으니까 싫은데?
(솔직히 글로 옮겨 적으면서도 이게 과연 마흔네 살의 대화인가 싶다.)
무슨 개소리야. 이거 대화 옳지 않아. 빨리 AI한테 물어봐.
그래서 또 물어본 켠은 AI의 답변을 보고는 조용히 일어나서 맥주를 깠다. AI가 사람보다 낫다며 셋이 한참 웃었다.
체크아웃. 프런트에 짐 맡기고 호텔에 있는 몰을 돌았다. 켠이 제일 앞섰다. 여러 곳을 구경하면서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분명 충동구매의 상징이었는데. 결혼하더니 달라졌다. 나보고 톰 브라운 셔츠 하나 사라길래 택을 꺼내 가격표를 보았다. 조용히 사진을 찍고 다시 넣었다.
3층에 오락실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한국에선 보지 못한, 커다란 농구 게임기가 있었다. 공도 진짜 농구공. 이걸로 게임을 했다. 진 사람이 한국 공항에서 커피 내기.
켠은 키 186cm로 평소 농구를 즐긴다. 팡은 스포츠맨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진은 소싯적에 오락실을 많이 다녔다. 켠의 우승이 당연시되는 상황. 결과는 의외로 팡이 1등. 꼴찌가 누구였는지는 영상으로 첨부한다.
다음은 펀치. 별다른 내기는 걸지 않았다. 팡이 제일 잘 쳤다.
이 정도면 스포츠맨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스포츠맨 아니냐?
우리의 리더이자 보스인 팡이 신났다. 그거면 됐다.
떨스티가 나왔다. 첫날 그린망고셰이크 먹었던 곳. 커피를 마실 예정이라 한 잔만 시켜 나눠 먹었다. 역시 맛있었다.
다시 몰을 돌다가 어제 갔던 편의점에 들어갔다. 구석에 가 보니, 한국 라면을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게 아닌가. 계란 치즈 김치 추가도 되는데 심지어 한국보다 더 쌌다.
팡아. 라면 먹을래?
어 그럴까?
오케이. 켠아. 라면 먹을래?
아니 싫어.
켠은 T가 분명하다. 그래 세부 와서 라면으로 배를 채우면 안 되지. 그게 옳지. 그래서 안 먹었다.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남은 일정을 정하기로 했다. 둘이 흡연하는 사이 먼저 자리를 맡았다. 거 담배 끊으면 얼마나 편한데. 커피를 마시며 켠팡은 무얼 할까 고민했고 나는 여행기를 썼다.
마지막 일정은 찐 로컬 마사지샵을 가보기로 했다. 한국인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곳. 그래서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리뷰는 괜찮은 곳.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JTL스파였다.
호텔에서 너무 늦게 나왔다. 마사지 전에 배가 고팠다. 스파 근처에 중식당이 있었다. 산동. 한국식 중화요리를 파는 곳. 그러고 보니 팡이 짬뽕 먹고 싶다 했었지. 입구에서부터 한국 노래가 들렸다. 메뉴판은 대놓고 한국어였다. 쟁반짜장, 볶음밥, 탕수육, 군만두로 구성된 세트에 짬뽕을 추가했다. 전반적으로 무난했다. 특히 짬뽕국물이 반가웠다.
밥 먹고 스파로. 스파는 다소 외진 곳에 있었다. 오히려 기대가 커졌다. 90분 오일마사지 500페소. 거저다 거저. 마사지를 받으며 ‘어쩌면 필리핀에서 마사지사들은 나름 전문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길이 아주 능숙했다. 더 받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모든 일정이 끝났다. 호텔의 맡긴 짐을 찾아 다시 공항으로. 출국 수속은 빨리 끝났다. 면세점은 작았다. 마땅히 살 것도 없었다.
망고와 작별할 시간. 캐빈바라는 곳에서 망고셰이크를 팔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마지막 망고셰이크를 마셨다. 한 모금 마시자 크랩집에서 마셨던 첫 망고셰이크가 떠올랐다. 두 번째 모금에선 쉐라톤에서의 첫 생망고가 떠올랐다. 세 번째 모금에선 카본시장에서의 망고 2킬로가 떠올랐다. 분명 처음 먹을 땐 맛있어서 1일 3 망고 하기로 다짐해 놓고는, 한 번 실컷 먹은 이후론 망고를 소홀히 했다. 안녕. 망고. 고마웠어. 다음에 다시 온다면, 그땐 소홀히 하지 않을게.
남은 시간 뭘 할까 고민했는데 켠이 라운지에 가보자며 팡진을 이끌었다.
응? 우린 라운지 카드가 없는데?
내 걸로 해보게. 밑져야 본전이니까.
켠은 라운지 프론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될 거란 기대가 전혀 없어서, 나는 그 옆에 서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야 됐어. 됐어. 가자.
?! 어떻게?
내가 라운지 되는 카드가 좀 많아.
그래서 기대도 없던 라운지에 왔다. 일단 편해서 좋았다. 술도 주고, 밥도 주고. 먹을 게 없다 싶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포크 험바가 밥도둑이었다. 비행시간을 버틸 만큼 든든히 먹었다. 켜니 짱짱맨. 한국 가면 밥 한 끼 사야겠다.
켠과 팡진은 다른 비행기를 탄다. 도착해서 같이 밥 한 끼 먹기로 했다. 물론 커피도 얻어 마셔야 한다. 잠시 헤어져 각자의 비행기에 탑승. 세부, 잘 놀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