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헤어질 결심
"한국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 영화 <헤어질 결심>, 서래의 말
(이미 많이들 보셨겠지만 영화 <헤어질 결심>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전국의 불륜남녀들의 심금을 울릴 명대사가 등장한다. 서래(탕웨이 분)가 유부남인 해준(박해일 분)에게 말하는 바로 그 대사다. "한국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이 대사를 영화를 안 본 친구들에게 말해주면 다들 웃음을 참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잘 쓴 대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만둡니까'라던지 '멈춥니까'가 아니라 '중단합니까'라고 말하는 부분이 외국인이 구사하는 문어체 느낌의 구어를 너무 멋지게 그려낸다.
서래와 해준은 서로 엄청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기존 영화들에서 불륜이라는 소재를 그려낼 때 흔히 쓰이는 섹슈얼한 터치도 거의 없다. 서래와 해준은 그저 끊임없이 서로를 관찰하고, 숨을 나눠 쉬고, 서로를 듣는다. 하지만 둘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서로에 대해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그건 어느 순간에는 성적 긴장감이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사건에 대한 긴장감이기도 하다. 그래서 둘이 숨 쉬는 걸 바라보고 있자면 오히려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히는 숨소리다.
영화에는 해준의 아내인 정안(이정현 분)도 등장한다. 해준과 정안은 노골적으로 성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심지어 둘 사이의 섹스씬도 나온다. 하지만 둘 사이엔 좀처럼 성적 긴장감이 흐르지 않는다. 서로 긴장하기엔 너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둘은 끊임없이 섹스를 하고자 하는데, 성적 긴장감이 폭발해서 마침내 섹스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해야 해서 하는 것이다. 의무인 섹스는 귀찮기까지 하다. 해준이 정안에게 마지막에 외치는 대사마저 어딘가 좀 나사가 빠진듯하다.
긴장감과 안정감은 좀처럼 공존하기 어려운 감각이다. 특히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새로운 관계가 아니고서야 좀처럼 긴장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안정감만으로 사랑할 수 없다. 긴장감에서 비롯되는 욕망이 더해져야 무언가 스파크가 튀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는 그 긴장감이 없어서 스파크가 튀지 못하고 오래 켜놓은 초마냥 조용히 불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안정감은 가정을 유지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지만 관계를 권태에 빠지게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륜을 저지르는 이유가 바로 그 긴장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적 긴장감을 찾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상간 소송을 하기 위해 찾아온 의뢰인들이 흔히 "내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XX를 만나?"라고 화를 내곤 하는데, 불륜 상대가 기존의 결혼 상대보다 더 나아서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냥 긴장감을 불러올 '새로운' 만남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경우가 많다(흔히 막장드라마에서도 불륜 상대가 원래 배우자보다 별로다.). 안정감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정되지 않은 날것을 찾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부디 배우자의 불륜 때문에 '내가 뭔가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하거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불륜을 저지르는 스스로에게 도취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안정된 상태보다 긴장한 상태에서 조금 더 멋지다. 집에 와선 다 늘어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늘어져 있다가도 밖에 나가 거래처와 미팅을 해야 하면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고 각 잡힌 톤으로 대화를 한다. 배우자와 함께 있는 안정적이고 조금은 헐랭한(?) 스스로의 모습보다 불륜 상대와 함께 있는 각 잡히고 긴장된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똑같은 박해일 배우가 연기하지만 해준이 정안과 있는 모습보다는 서래와 있는 모습이 더 섹시하고 멋있다. 자아도취된 불륜남녀들은 배우자에겐 하지 않을 오글거리는 절절한 사랑고백을 불륜 상대에겐 스스럼없이 한다. 그래서 상간 소송을 다루다 보면 로맨스 영화 뺨치는 온갖 대화를 다 접하게 된다. 그런 말들을 배우자에게 하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불륜은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배우자에게도, 불륜 상대에게도,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결국은 상처만 남길 것이다. 많은 경우에 불륜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결국 아무도 행복하지 못했고 모두가 붕괴되었다. 결혼은 로맨틱한 무언가가 아니라 서로를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다는 계약이다. 긴장감이 끊임없이 유지되는 사랑을 원한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애인을 바꾸는 편이 나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을 하더라도 계속 좋아하는 것은 자유지만, 자유가 마침내 상처를 낳을 뿐이라면 그 관계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