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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못난인형 Feb 23. 2023

늦바람 신바람

지천명이 되어서야 글 쓰는 재미와 재능을 깨달았다. 늦둥이를 키우며 취미로 하게 된 라디오 사연 쓰기를 통해서였는데 통통 튀는 성격처럼 밝게만 쓴 글임에도 채택률이 높았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배움의 길을 몰라 막막했을 때, 블로그 이웃들과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을 시작으로 시흥시 평생학습관 글쓰기 강좌 수강, 글쓰기 동아리 활동,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입학으로 활동을 넓혀갔다. 미약하지만 꾸준함의 성과로 올해 학습동아리 활성화 지원사업인 별별연대 글쓰기 강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준비 없이 맡은 봉사직이었다.     

 

68세 막내부터 88세 맏언니까지의 수강생들은 다양한 연령대만큼이나 한글 실력이 천차만별이었다. 첫 만남에서 글쓰기라는 말을 하자 대부분이 겁을 내고 두려워했다. 

“글을 써서 뭐 해? 글 쓰라고 하면 도망갈 거야!” 

글쓰기 이전에 친숙해지는 일이 먼저였다. 첫날은 전체 회원 앞에서 말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둘째 날은 글쓰기를 쉽게 느끼도록 한 줄 글쓰기를 했다. 대부분 회원이 무학인 상태에서 최근 문해교실을 통해 한글을 익혔기에 글 한 자 쓰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말을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위해서 수업 이외에도 소규모 만남을 통해 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가슴 속에 묻어 둔 이야기,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를 종이 위에 몇 줄이라도 쓰도록 도왔다. 

“쓰니까 써지네. 내 말을 어디 가서 하겠어. 내 이야기를 하면 같은 말 자꾸 한다고 자식도 싫어해.”

꾹꾹 눌러 적는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온 힘을 다해 정성을 기울여 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성작가의 멋스러운 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자연스럽고 솔직한 글이었다. 과장되거나 장황하지 않은 글에서 다정함이 느껴졌고 코끝 찡한 힘 있는 글도 있었다. 발음 나는 대로 꾹꾹 눌러쓴 삐툴빼툴한 글씨에서 정겨움도 묻어났다. 회를 거듭할수록 처음과 달리 분위기가 좋아지고 자신감도 엿보였다. 

수업 시작 전 한 시간 일찍 나온 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보행보조기를 끌고 참석한 분, 주말에도 글을 쓰고 다듬어 보내준 분, 작품집에 한 편이라도 더 싣고자 마감일까지 작품을 보내준 분도 있었다. 막연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삶은 무료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고물 버스가 먼지와 함께 사라질 때면 언덕 너머 세상이 궁금했다. 먼 거리 여행은커녕 읍내 나들이도 쉽지 않던 그 시절, 형형색색의 크레파스로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두메산골을 벗어나 바닷가도 가고 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탔다. 들뜨고 행복했다. 그림 그만 그리고 공부 좀 하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학교 대표로 군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방학 숙제인 그림일기도 글보다 그림에 공을 들였다. 반면 4~5줄에 불과한 의미 없는 글은 매번 ‘나는~’으로 시작해 ‘~해야겠다’로 끝나는, 체벌을 면하고자 마지못해서 하는 숙제에 불과했다. 개학 전날이 되어서야 몇 장의 글을 간신히 쓰고 지나간 날씨를 몰라 쩔쩔매기도 했으니 글쓰기는 넘기 힘든 뜀틀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읽을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였으니 문학에 관심 가질 환경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교생을 대상으로 독후감 대회가 열렸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찢어진 책이라도 있나 집안을 두리번거리던 중 아궁이 앞에 놓인 불쏘시개용 어린이 잡지를 찾을 수 있었다. 이웃에서 얻어왔을 책은 이미 앞뒤로 여러 장이 뜯긴 상태였지만, 다행히 단편이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제목은 지금도 기억나는 「꽁치가 된 어머니」였다. 밥만 겨우 먹던 나와 같은 처지의 주인공이 되어 부랴부랴 독후감을 낸 뒤 전교생 앞에서 단상에 올라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개근상을 제외하면 학창시절에 받은 유일한 상이었고 국어 과목을 사랑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어느 해, 추수가 끝나고 목돈이 생긴 부모님은 동네를 떠돌던 외판원에게 나와 여섯 살 터울이 나는 언니를 위해 문학 전집을 들였다. 돈이 생기면 당연하게, 돈이 없어도 외상으로 술을 먹던 아버지가 책을 돈 주고 사다니 놀라움에 난데없는 존경심도 들었다. 추측건대 기분파인 아버지가 즉흥적으로 구매하고서는 본전 뽑을 생각으로 언니에게 열심히 읽겠다는 다짐도 받았으리라. 

가난한 살림에 전집은 고가의 물품이었지만, 누구의 관심도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장식품 역할에 그쳤다. 조숙하고 외향적인 언니가 군부대에서 운영하는 교회를 다니며 곁눈으로 익힌 피아노 솜씨로 반주를 맡고, 몰래 연애할 동안 먼지만 두껍게 쌓여갔다. 책상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사색하던 언니를 본 적이 없으니 부모님의 바람은 물거품이 된 듯했다. 

화석처럼 꼽혀 먼지만 뒤집어쓴 전집에 관심이 갔다. 황톳빛 하드케이스를 가만히 손끝으로 만지면 거칠지만 고급스러움이 느껴졌고, 갱지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는 호기심을 불렀다. 책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 대부분 글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어려웠지만, 두세 번 읽으면 이해되는 글도 몇 권 있었다. 김동인의 「감자」와 「발가락이 닮았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등이 지금도 생각나는 작품이다. 부록으로 준 열 권짜리 『제5공화국』은 손도 대지 못하고 사라진 추억이 되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글쓰기로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뒤늦게 들었다. 그 아쉬움이 나이 든 학생을 만나는 원동력이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되었다 할 수 있다.

나의 조그마한 재능이 도움이 되어 한 권의 작품집이 탄생하던 날, 어르신들이 흥분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내 이름으로 책이 나올 줄 상상이나 했겠어.”

“책으로 나올 줄 알았으면 더 잘 쓸 걸 그랬어. 아직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책을 쓰다듬으며 꼼꼼히 페이지를 넘기고 품에 꼭 안으며 행복해했다. 

글을 모르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넘어 뿌듯한 성과를 이룬 어르신들 모습 속에서 한 뼘만큼 성장한 내가 보인다. 이제는 그림보다 글이 더 친숙한 일상이 되었다. 부르르 몸을 떠는 핸드폰을 여니 83세의 학생으로부터 반가운 문자가 왔다.

“소중한 만남 너무나 행복했고 감사합니다. 제 이름 석 자가 책에 실릴 수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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