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간단한 짐들을 풀고 미리 아마존에서 주문해 둔 매트리스를 풀어 잠을 청하던 첫날밤이 문득 떠오른다. 도무지 긴장이 되어서 쉽게 잠들 수 없었던 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우리 세 딸들도 그랬겠지? 그날의 느낌은 그냥.. 태평양 한가운데에 둥둥 떠있는 느낌이었다. 여기는 어디인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아득한 느낌. 한국의 모든 것과 이별하고 떠나 왔는데 무언가 내 영혼은 아직 거기에 있는 것 같고 말이다.
공항에서 친정부모님과 눈물의 작별을 하고 청약통장도 해지하고 보험도 해지하고.. 40년 동안 지켜오던 많은 것들과 이별하고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데. 이곳은 너무 낯설고 낯선 느낌.
여기 이 세상 많은 현상이 설명되는 이론이 있다.
"시간이 약이다."
그래도 그 1년이 뭐라고.. 그 시간이 지나니 이제 조금 편안해졌다. 처음엔 물을 어디서 사야 할지, 빵과 샐러드는 무얼 사야 하는지, 아이들은 샐러드 먹고 계속 설사를 하고 배 아프다고 하고... 한국 마트를 가야 하는데 차가 없어 가지도 못하고 빵으로 연명을 했던 시간들... 나는 내가 한식 없이도 잘 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일주일 넘게 빵만 먹으니 정말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우리가 이사한 이후 동네에 한인마트인 H마트가 운명적으로 오픈을 했고 우리 집 식탁은 하루 한번 꼭 거하게 한식이 차려진다. 그것이 우리 가족에게 일상의 아주 큰 기쁨이 되었다.
1년을 돌아보니 한식만큼 중요한걸 또 알게 되었다. "가족".
한국에서는 대학원도 다니고 가끔 강의도 나가고 친정집에 아이들도 맡기고 남편과 오붓하게 놀러도 다녔으며 그 많은 호사를 누렸었다. 그런데 모든 친인척관계, 친구, 학교 등 인간관계들... 차 떼고 포떼고 나니 남는 것은 오롯이 우리 다섯 식구였다. 즐거울 때도 힘들 때도 함께할 사람은 우리 식구뿐이었다.
가정은 부부가 중심이다 보니 우리의 부부 관계가 더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쓰고 싶을 정도이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고 앞으로의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였다. 이 낯선 타향에서 내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으며 어떻게 이 아이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하게 된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알아야 할 것도 많으며 해야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으련다. 어차피 닥치면 다 잘 해낼 거니까. 지금은 이대로 잠깐의 안도감과 여유를 느끼고 싶다. 남녀관계도 최소 1년 춘하추동은 겪어봐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민도 비슷한 것 같다. 1년이 지나니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늘 긴장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이방인이지만 그래도 살짝의 이 여유를 즐겨보련다. 낯선 문화와 사람들, 특히 영원히 나에게 낯선 두 번째 언어, 내 부족한 영어에 마음이 상할 때면 집 앞 트레일로 나가 마음껏 산책을 즐긴다. 자연이 나를 치유해 주는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