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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미나리 Oct 07. 2023

우리 방금 이민왔어요.

인생 2라운드의 서막

 2023년 6월 내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인천에서 시애틀로 가는 10시간 동안의 채널조정 화면이 지나가고 처음 연출된 장면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단프라박스(이사 갈 때 쓰는 큰 박스) 5개, 대형캐리어 2개, 기내용 캐리어 2개, 자잘한 짐가방들과 카시트까지. 이런 짐들을 가지고는 도저히 드라마처럼 아름다운 오프닝 장면이 연출될 수 없었다. 이 짐들만 있으면 다행이게? 우리 집 꼬맹이들 셋은 더 큰 짐이다. 인천에서 저녁 6시에 탄 비행기는 현지 시간으로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한국시간으로는 오전 5시가 된 건데, 밤새 비행기에서 쪽잠을 잔 아이들이 마냥 순순히 엄마말을 따라줄 리 없다.  


“엄마 졸려요.”


“엄마 배고파요.”


“엄마 다리가 아파요.”


 졸리고 아프고 배고프면 삼단콤보 상거지라고 어릴 때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어느 것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남편과 나는 입국심사대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공항중에서도 악명 높은 시애틀공항 입국심사대. 우리는 긴장하고 있었다. 미국영주권을 가지고 있고 법을 어긴 적도 없으며 불법체류를 해본 적도 없는데 입국심사대 경찰들만 보면 무섭다.


“(영어로) 이 많은 짐들은 다 뭐죠?”

미드에서 보다도 빠른 영어로 우리의 짐을 가리키며 날 선 눈초리로 묻는다. 아, 다행히 이건 내가 준비한 예상질문이다.


“These are for the household.” (이건 가정용이에요)

 살림에 진심인 하우스와이프인양 살포시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을 앞세우면 조금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는 입국심사 선배님들의 말이 떠올라서 얼른 아이들 셋을 우리 부부 앞에 나란히 세웠다.

 입국심사관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우리 다섯 명의 여권을 천천히 확인하고 한 명씩 이름을 호명하더니 얼굴을 확인했다.  


 “(영어로) 당신들은 왜 이렇게 한국에 오래 머물렀던 거죠? 작년 10월부터 솰라솰라~~”

 그렇지. 쉽게 넘어갈 리 없지. 모든 단어가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심사관은 우리가 영주권을 취득한 작년 10월부터의 기간을 문제 삼는 것 같았다.


 미국 영주권자는 원칙적으로 1년 중 반 이상의 기간을 미국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이미 2023년도 반이상이 흘러간 시점, 만약 긴 시간 동안 미국에 거주하지 않았다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불현듯 인터넷 카페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1년이 넘도록 미국에 없었던 가족에게 미국 거주에 대한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고 심사관이 입국을 거절하거나 영주권을 박탈하거나 했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들 말이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심사관을 납득시켜야 했다.


“We need time for ….. 여보 준비가 영어로 뭐지 준비? “


 당황을 하니 아는 단어도 잊어버린다. 나는 해외이주를 위한 충분한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다급해진 내 모습에 남편이 차분하게 심사관에게 설명했다. 완전한 이주를 위해서 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심사관은 다시 서류를 넘기며 우리에게 질문했다.


“Do you have a 라면?”

 심사관은 갑자기 다른 질문을 해왔다. 오 그럼 아까 그 문제는 넘어간 건가?


 안도감이 드는 것도 잠시, 나도 내가 뭘 넣었을지 모를 박스들을 쳐다보았다. 너무 많은 짐들을 챙기다 보니 마지막엔 잡히는 대로 넣은 것 같았다. 박스마다 안의 내용물을 적은 라벨을 붙이자는 남편의 말을 철저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 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의식의 흐름대로 내가 정말 라면을 넣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닐 거다. 육류 반입이 금지된 미국이라서 라면 스프 속 고기까지도 문제 삼을 수 있으니 가져가지 말라는 입국심사 선배님들의 글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당하게 “no.”라고 대답을 했다.


 모든 심사가 마무리되고 공항 입국 게이트의 문이 열렸다. 이제야 진짜 첫 발을 내디뎠다.

 마음 한편에 큰 장벽이었던 입국심사 관문을 통과했다는 홀가분한 마음에 그 많은 단프라박스와 짐들도 가볍게 느껴졌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내 두 손에 나도 모르게 불끈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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