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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자반 Feb 05. 2024

어른의 초심

수학)수학과 대학원 일기

*지난 글 '.' 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무간심연에 떨어진 기분이다.

넋 놓고 슬퍼만 할 수는 없다.

그게 가장 어른의 고통스러운 점이 아닐까 한다.

어렸을 때는 수학 숙제를 하기 싫으면 그냥 찢어서 버리거나, 

혹은 하기 싫다며 떼를 쓰고 드러누워 울면 된다.

그러고 몇 대 맞으면 끝이다. 

그러나 어른은 그렇지 않다.

울고 불고 떼쓰는 그 시간마저 어른은 책임져야 한다.

누군가 나를 호되게 때리고 (혹은 벌을 주고) '이제 진짜 잘하자'

라고 말하면, 어린 시절처럼 그 모든 게 다 없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른에게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점수 정정 신청 양식을 계속 쓰면서 

박사과정 재입학에 대한 생각을 한다.

석박통합 전환에 대해서는 강제 포기당했기 때문에 

나에게 남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지금 학교에서 석사 학위 후 박사 재입학

2. 다른 학교로 박사 진학

3. 석사 학위 후 취업 (응용수학)

4. 수학이 아닌 다른 일 하기 


처음에는 다른 학교로 박사를 진학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기울었다.

지금 학교에서 차마 얼굴을 들고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워서.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갈 만한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일단 국내에는 없다. 

그렇다고 해외를 나가는 것도 갚은 생각을 해봐야 하는 문제다. 

'이 자식이 우리 학교에 어떻게 들어왔지' 전형으로 대학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부적격자인 건 어쩌면 당연한 순리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응용수학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고 

수학이 아닌 다른 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살 것이었으면 나는, 애초에 이곳에 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세상과 타협할 기회가 정말 많았다.

외국어고등학교 재학 시절도

별로 뛰어나지 않았던 내 수능 성적도

토목공학과에서 보냈던 내 학부 시절도

즐겁지 않았던 프로그래밍을 배우던 나날도

좋은 기업에서 긍정적인 제안을 받았을 때도

나는 순응하기보다는 맞서기를 택했을 뿐이다. 




사실 박사과정 재입학 관련 규정을 찾아보다가 

내가 1년 전에 이 학교에 오기 위해 썼던 자소서의 일부를 발견했다. 


성공적인 삶이 무엇이냐 물었던 질문에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성공적인 삶'이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삶'을 정의하려 합니다. 삶이란 살아있다는 것, 즉 심장이 뛰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긴장하고 두려울 때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없이 작은 제 자신이 학문이라는 커다란 존재에 도전장을 내밀 때, 저는 두려움과 함께 제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따라서 저에게 있어 '성공적인 삶'이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과 그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성실함입니다.

대학 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도전은 이번 1학기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복소기하학을 수강한 일입니다. 4학년인 저는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복수전공자로서 더 뛰어난 수학과 전공자들과 함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저는 책상 앞에서 끝없는 걱정을 하는 대신 도전을 택했습니다. 학부생으로서 대학원 수업을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독일의 00000 대학에서 복소기하학을 수강하였습니다.

000의 수학과 학위과정은 제 도전의 연장선입니다. 특유의 열정적인 학풍과 응용수학, 기하학에 많은 교수님들을 보유한 000은 저에게 무수한 기회를 안겨 줄 것입니다.  
따라서 000은 저를 현시대의 대한민국이 원하는 연구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전 시대의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따라가는 것에 주목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시대의 대한민국은 세계의 선두주자로서 학풍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선두에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적인 관점에서도, 저 개인의 자아실현 측면에서도 연구자가 가져야만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토목공사는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정해진 공사 기간을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기간 내로 공사 완료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토목인이라면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이제 토목인이 아닌 수학자로서 이 대답을 외치고 싶습니다. 어떠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성공할 수 있을지, 저에게 너무 어렵지 않을지, 너무 어려워 포기하진 않을지 가능성을 따지기보다는 이 연구가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그 하나만으로 이 대답을 외치며 당당히 선두에 서는 도전을 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마주하고 보니 마음이 아팠다. 

삶이란 살아있다는 것,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사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책상 앞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무엇이든 액션을 취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재입학이 별 건가, 어쨌든 액션과 도전은 (거의) 공짜다.

지금 부적격자라고 뭐 좀 부끄러우면 어떤가. 

진짜 부끄러운 것은 미련이 남았음에도 수학을 하지 않겠다고 도망가는 행위다. 


박사과정 재입학을 하려면 

일단 석사 논문부터 통과해야 한다. 

졸업을 위해 해야 하는 필수 학점도 남았다.

박사과정에 해당하는 수당을 못 받는 것 또한 마이너스다.


조금 많이 막막하지만 어쨌든 나는 재입학을 마주하려 한다. 

괜찮은 날도 있을 테고 또 괜찮은 마음이 한순간 우그러져 우는 날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며 간신히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도 친구가 와서 앞으로 2년이 지나도 석사 논문을 절대 못 쓸 거라고 분야를 바꾸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도전을 계속할 것이다. 


자소서의 연구계획서 부분 마지막 부분에 쓴 문단을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그러나 그렇기에 저는 더 대담해지고 싶습니다. 실패와 틀리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그에 따른 피드백을 받고 싶습니다. 도전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이리저리 부딫혀가며 결국은 앞서 제가 정의한 '삶다운 삶',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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