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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Jul 16. 2024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멸망한다면

씨네아카이브 44. 좀비영화 BEST 4 

여름의 문턱을 넘어서니 우중충한 날씨 속에 장마와 무더위가 수시로 오락가락한다. 가끔은 날씨와 그날의 기분에 맞춰 영화를 골라 보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연일 우중충한 날씨라 다크 모드 당첨! 


씨네아카이브 44.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멸망한다면" 전문 읽기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와 좀비 영화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권인 ‘묵시록’을 뜻하는데 묵시록에 묘사된 ‘종말’의 이미지와 흡사하다는 점 때문에 세상이 멸망할 정도의 재난을 그린 작품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현대 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이 번진다거나 (전염병 아포칼립스), 지구 밖의 존재로부터 침공을 당한다거나 (외계인 아포칼립스), 현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사건이 벌어진다거나 (좀비 아포칼립스) 하는 등의 이야기를 다루며,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멸망한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아포칼립스 장르의 묘미는 긴장감 넘치는 극적인 연출을 보는 재미도 있겠지만, 단순히 재미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인간 군상의 갈등과 고뇌 속에서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기도 하니까. 누군가의 본성은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난다는 말처럼 나라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어떤 선택을 내릴까 등을 고민해 보는 게 꽤 흥미로운 지점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중에서도 좀비 영화를 가장 즐겨보는 만큼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작품 4편을 꼽아봤다.



<28일 후… (28 Days Later…>, 대니 보일, 2002년 개봉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28일 후…>는 장르의 마술사로 불리는 대니 보일 감독의 작품으로 엄밀히 따지면 좀비 영화는 아니다. 일종의 전염병이라고 할 수 있는 ‘분노 바이러스’가 확산해 인간들이 좀비처럼 변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는 점에서 좀비와 흡사 하기는 하다. 영화는 800만 달러 저예산으로 제작해 10배가 넘는 수익을 거둬들이며 성공했는데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요소이자 지금도 좀비 영화의 표본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가 기존에 그려진 좀비 이미지를 바꿨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처음으로 미친 듯이 달리는 좀비를 등장시켜 관객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므로.


영화는 아포칼립스 장르 특유의 공포심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생존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균열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공포 심리를 그리는 영화가 성공하기 위해선 사람들이 항상 느끼는 불쾌함, 인간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위험요소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28일 후…>는 “일종의 쥐덫이고, 그 안에 들어가면 꼼짝없이 90분 동안 얼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다음에는 극장 밖으로 빠져나와 이제 괜찮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라며 무섭지만 동시에 상쾌한 영화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고 밝히기도 했다. 솔직히 영화 후반부터 결말까지 보고 나면 ‘어느 지점에서 상쾌함을 느껴야 할지 찝찝하긴 하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좀비 영화에 입문하게 된 작품이자 좀비 영화의 틀을 바꿔놓은 작품으로 꼽히는 만큼 감상해 보시길 추천한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에드가 라이트, 2004년 개봉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예전에 소개한 <베이비 드라이버>를 연출한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작품으로 좀비가 창궐한 런던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호러를 가장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제작사가 영국의 로코 명가 ‘워킹 타이틀’!) 영화는 현대 좀비 영화의 창시작으로 불리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패러디했는데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연속성을 지니는 트릴로지와 달리 주인공이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 듀오라는 점을 제외하면 3부작의 내용과 설정은 모두 다른데 이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3부작>을 패러디한 것으로 ‘코르네토 3부작’으로 부른다. 코르네토는 영국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각 영화들은 순서대로 딸기맛, 바닐라 맛, 페퍼민트 맛을 상징하고 있다고. (1편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딸기맛, 2편 <뜨거운 녀석들>은 바닐라 맛, 3편 <지구가 멸망하는 날>은 페퍼민트 맛!)


영화는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가 가지는 클리셰를 패러디하면서도 기존의 좀비 영화였다면 가장 먼저 희생되었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모아 놓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과 각본에도 참여한 사이먼 페그는 “미국 영화를 보면 위기가 닥쳤을 때 주인공들이 대처할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걸 보게 되는데 만약 나에게 저런 일이 닥친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고민하며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숀은 술이 덜 깬 상태로 일어나 좀비가 활보하는 거리를 가로질러 슈퍼에 다녀온다거나, 집 뒤뜰에 들이닥친 좀비를 물리치려 모아놓은 LP를 던지는 와중에도 던져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등 뜬금없는 포인트에서 웃음이 터진다. 감독은 영화를 호러가 아닌 ‘주인공들의 만남을 방해하는 제삼자가 좀비로 등장’한 로코로 봐주길 바랐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좀비 영화지만 유머로 가득 차 있고, 동시에 코믹하지만 연출은 굉장히 잔인하게 묘사된다. 영국식 블랙 코미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작품!



<좀비랜드 (Zombieland)>, 루벤 플레셔, 2009년 개봉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좀비랜드>는 루벤 플레셔 감독이 연출하고 제시 아이젠버그, 우디 해럴슨, 엠마 스톤, 아비게일 브레스린 주연을 맡은 코미디 좀비물로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너드남 콜럼버스가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만나게 된 인물들과의 고군분투 생존기를 유쾌하게 그렸다. 영화는 공포와 긴장감으로 가득한 좀비 영화와는 다른 결을 가진, 호러 보다 코미디에 가까운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소개하는 4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좀비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기존 좀비 영화의 틀을 깨며 흥행에 성공, 1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이후 10년 만인 2019년에는 속편 <좀비랜드: 더블 탭>이 제작되기도 했다. 속편에는 1편의 주인공들이 모두 출연했는데 1편이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인지도와 몸값이 어마어마하게 오른 상태에서 모두 출연했다는 것이 가장 놀라운 부분.


<좀비랜드>는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영화 중 가장 유쾌한 B급 감성의 코미디 영화로 평론가를 비롯한 관객들에게도 좀비 코미디물의 진수라 평가받는다. 좀비 영화이면서 동시에 주인공들이 길 위에서 만나 함께 하며 위협을 헤쳐나가는 로드 무비와 전혀 다른 이들이 모여 또 다른 공동체를 이루는 가족 영화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좀비 영화는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갈등이 등장해야 한다는 편견을 깨 부수고, 시종일관 시니컬하고 코믹한 톤을 유지하고 있어 처음 봤을 때 정말 신선한 느낌이었는데 좀비물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



<월드워 Z (World War Z)>, 마크 포스터, 2013년 개봉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월드워 Z>는 맥스 브룩스의 소설 『세계대전 Z』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원인불명의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UN 조사관이었던 주인공 제리가 감염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렸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과 함께 제작에 참여하면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시간 여행자의 아내>, <머니볼> 등 원작을 영화화하는데 관심을 보여온 브래드 피트는 원작 소설의 판권을 두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끄는 제작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판권을 얻을 수 있었다고.


원작 소설은 주인공이 재난을 경험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풀어간다면, 영화는 핵심적인 줄거리만 유지하고 주인공 ‘제리’의 시선에서 그가 겪는 재난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무엇보다 타이틀에 걸맞게 여러 대륙을 오가며 블록버스터에 걸맞은 극적인 연출과 스펙터클 한 장면들이 시종일관 펼쳐지는 ‘화려한 좀비 영화’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른 영화와 달리 속편 제작이 무산되었다는 점이랄까. 원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연출로 속편을 제작할 계획이었으나 오랜 시간 미뤄지더니 제작비 이슈로 무산되었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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