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인도여행을 하면서 도착한 도시는 바로 바라나시다. 인도의 많은 도시 중에서 왜 바라나시를 여행했냐고 물어보면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길 해 본다면 바라나시는 곧 인도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인도 내에서도 바라나시는 신성시 여기는 곳이다. 갠지스 강이 흐르는 힌두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죽기 위해 오는 곳. 죽어서 오는 곳.'
이러한 이름이 붙은 데는 갠지스 강이 있다. 바라나시의 가트 앞을 흐르는 강. 즉 갠지스 강은 인도의 '신성'스러운 물이다. 힌두교 교인이 국민의 대부분인 인도는 갠지스 강을 '인도의 어머니', '돌아갈 신의 품'이라고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이곳을 죽으러 온다. 죽으러 온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세상에선 바라나시는 그런 의미를 가진다. 신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세상에서 절대 변함이 없는 원칙이 삶과 죽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났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죽는다. 이러한 변함없는 원칙은 이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다.
살기 위해 혹은 죽기 위해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근다. 갠지스 강은 바라나시 화장터에서 타고 남은 재가 떠내려온다 타다 남은 시체도 떠내려온다. 동물의 사체도 떠내려오고, 돈이 없어 화장터에 쓸 수 있는 나무를 구입할 수 없는 화장하지 못한 시체도 떠내려 온다.
그게 갠지스 강이고, 이곳이 바라나시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의 오염을 우려한다. 하류로 내려 갈수록 오염이 가득한 이곳에서 사람들이 쾌적한 삶을 과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영혼이 깃든다는 말 한마디에 부유물이 가득하고 파리나 모기 같은 해충이 범람하는 물에 들어가 머리를 담그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설령 나와서 바로 씻는다고 해도...)
나라와 도시에선 자정관리에 힘을 쓰고 있지만 그 속도가 오염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오염은 심각해져만 가는 중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에서 강으로 내려가는 가트 위에서 바라보는 강은 그저 고요함을 가진 강물이다. 어떤 부유물도 나에게 닿지 않아서 그런지 뭍에서 보는 물은 평화롭기만 하다. 간혹 아이들이 생각 없이 달려들어 돈을 요구하거나 갠지스 강에 띄울 뿌자를 강매한다.
돈을 요구하는 철없는 아이들은 상대 안 하는 게 상책이고, 뿌자는 아랫마을에 내려가 강에 떠내려오는 뿌자를 다시 건져 올려 약간만 손봐서 오랜 시간 재사용되는 것이라 의미를 가지고 띄운다면 아이들에게 사는 건 비추천한다.
가트에 앉아 있으면 불청객이 또 하나의 불청객이 다가오는데, 전혀 귀엽지 않은 들개 무리다. 개는 밖에서 키우는 거라는 우리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자란 들개는 소 때만큼이나 비호감인 녀석들이다. 들개가 휩쓸고 간 자리엔 개벼룩과 악취만 남아 있다.
불쾌하고 냄새나고 귀찮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를 여행한다고 하면 바라나시를 추천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삶과 죽음의 모습을 수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삶이 지겹고 무기력하며, 특별한 일이 없다고 느껴지면 장례식장을 가 보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죽음을 묵도했을 때 전해지는 어떠한 울림이 다시 방향성을 잡아 줄 수 있다는 표현이다. 바라나시는 매일이 죽음과 함께하는 곳이고, 스스로의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함께 있어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 가족, 친구, 연인은 떨어지면 비로소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타인의 죽음은 삶에 대한 소중함을 스스로가 망각했을 때, 하늘에서 주는 영양제가 된다.
인도를 간다면 반드시 바라나시 가트 위에 앉아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좋은 영양제를 먹고 오길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