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서평(진보너머 독후감 공모전 최우수상)
5/24~6/6 동안 진보너머 커리큘럼에 대한 독후감 공모전을 개최했습니다. 본 독후감은 최우수상을 받으신 한상조 님의 글입니다.
들어가는 말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인문학 교수 마크 릴라(Mark Lilla)가 2016년 미국 민주당의 패배와 트럼프 현상의 원인을 저술한 책이다. 많은 이들은 5년 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전 세계가 놀랐다. 특히 미국 민주당과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겪은 충격과 공포는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막말과 기행을 일삼는 그런 사람을 뽑을 수 있단 말이냐"며 한탄한 이들은 부랴부랴 패배 원인을 찾아 나섰다. 이 책의 저자 마크 릴라는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집착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고 공언하는 그는 미국 민주당과 진보 세력이 다양한 사회집단에 속한 타인들에 대한 신뢰와 연대를 포기했다고 질타한다.
저자는 미국 정치사를 1930년대에 시작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통치 체제와 1980년대의 로널드 레이건 통치 체제, 두 가지의 큰 흐름으로 구분한다. 루스벨트 통치 체제는 '시민이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기본권의 부정에 맞서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미국'(p.12)을 그렸다. 레이건 통치 체제는 '국가의 속박에서 풀려난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 기업이 번창하는 더 개인주의적인 미국'(p.12)을 그렸다. 연대, 기회, 공적 의무를 표어로 하는 루스벨트 통치 체제는 민주적 설득과 타협 등 정치적 과정을 중시했고, 자기 신뢰와 최소 정부를 표어로 하는 레이건 통치 체제는 정부와 정치의 역할을 불신하는 만큼 반(反)정치적이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체제가 변질되고 퇴조하는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생생히 보여준다.
신좌파와 정체성 정치
1930년대 뉴딜 정책으로 시작된 루스벨트 통치 체제는 1960년대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과 시민권 운동 시기까지 영향력을 유지했다. 1960년대 신좌파가 등장하면서 미국의 진보주의는 변하기 시작했다. 신좌파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로 인종, 성별, 종교, 성적 지향 등 개인의 정체성을 정치의 테마로 삼았다. 문제는 이들이 다양한 사회집단을 초월한 연대 의식과 공적 의무감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신좌파 출신의 교수들에게 배운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그 정체성에 따라 스스로를 역사의 피해자로 규정한다.
정체성 개념이 미국 민주당과 진보 세력의 문화를 잠식했다. 정체성에 집착하는 진보주의자들은 “X로서 말하는 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p.94) 같은 투의 발언으로 백인, 남성(특히 백인 남성), 이성애자, 낙태반대론자들의 입을 틀어막으려했다. 정체성 정치는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과 결합해 모든 언어 표현에 편견이나 차별이 없는지 검열하는 도구가 됐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어느새 원조 신좌파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으로 변했다. 진보 세력은 집회, 운동과 법원 판결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주력하고, 민주적 설득과 선거로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업은 소홀히 했다. 유권자들에게 진보는 점점 '잘난 체 하는 사람', '꽉 막히고 피곤한 사람'으로 보였다.
정체성 정치와 PC의 덫에 빠진 한국 진보
최근 수년 동안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군 이슈 중 하나가 바로 남녀 갈등이다. 일베에서 유행하던 여성혐오는 메갈리아, 워마드 등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남성혐오로 '미러링' 되었다. '한남충', '재기해', '남자는 잠재적 성범죄자' 같은 남성 혐오 발언과 조롱이 쏟아졌다. 남성 누드모델의 신체를 도촬해 버젓이 인터넷에 유포하는 사건이 있었고, 남성 일반을 '관음충', '한남충'으로 비하하는 논문이 정식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특히 성추행, 성폭행 관련 시비는 남녀 갈등을 더욱 증폭시킨 도화선이었다. 성범죄 의혹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진술을 무시하는 관행은 '유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양측 말을 다 들어보자'며 사실을 규명하자는 사람도 '성폭력 2차 가해자'가 됐다. 남성을 연대할 수 없는 대상, 적(敵)으로 보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한국 여성운동을 넘어 진보 정당과 진보 운동에 깊숙이 침투했다.
여성 정체성에 천착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은 일반 남성뿐만 아니라 게이와 트랜스젠더까지 적대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적대감은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합격자 입학 반대 논란으로 확인되었다. “X로서 말하는 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 식의 발언은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의 진보 운동에서도 흔히 보이는 형태가 되었다. 상대방의 발언을 제한하여 토론을 독점하려는 습관은 생산적인 토론은커녕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마저 가로막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존엄과 정체성이 짓밟혔다고 화를 내고 있다. 평범한 시민들은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지 자기 검열을 하게 되었다.
한국의 진보 세력은 미국보다도 더 빨리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의 덫에 빠졌다. 이는 다양한 집단의 정체성에 관해 생각하고 성찰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70~1980년대 한국 진보 세력의 제1과제는 정치적 민주화였다. 우선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는 과제가 급선무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진보는 노동운동, 시민운동, 부정부패 척결을 시대적 과제로 삼았다. 여성, 외국인, 성 소수자가 진보 세력의 주요 이슈로 거론된 역사는 상대적으로 매우 짧았다. 진보 정당과 운동이 여성운동과 손을 잡고 페미니즘을 새로운 화두로 삼은 역사는 10년 남짓이다. 여성 정체성과 페미니즘에 관해 생각과 담론이 성숙할 만한 시간이 그만큼 부족했다. 진보 운동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피로감과 환멸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역풍
남녀 갈등은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이 역풍을 맞는 근원이 되고 있다. 남성들도 "어머니, 이모 세대의 여성들이야 차별받았지 요즘은 우리가 역차별 당하는 것 아니냐", "조금만 잘못해도 성폭행범으로 몰리고 법원에서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이라며 강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욱 큰 문제는 남성들이 실제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더욱 외면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길거리에서 성폭행이나 구타를 당하는 여성을 보고도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가는 게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지기까지 했다. 남녀 집단 간의 불신과 적대는 위험 수위에 가까워지고 있다.
불만에 찬 남성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투표로 보여주었다. 4월 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20대 남성의 72.5%, 30대 남성의 63.8%가 보수 후보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때 민주당과 진보의 지지 기반이었던 이들 2030 남성들이 대거 이탈한 것이다. 자유주의 정당(민주당)과 진보주의 정당(정의당)이 래디컬 페미니즘으로 인한 파열음을 수수방관하거나 심지어 편승한다는 인식이 이들을 분노케 한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 정치에 질린 유권자,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대안 우파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안 우파와 트럼피즘은 진정으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PC(정치적 올바름)에 지친 이들이 잠시 반PC,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대안 우파에 눈길을 준 것은 사실이다. 다문화와 난민 구호에 특별한 반감이 없는, 사회문화적으로 중도에 가까운 유권자들도 대안 우파와 극우파의 불법체류자에 대한 강경 정책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안 우파와 극우파 역시 '항상 화가 난 사람들'이다. 반PC 기류에 편승해 모든 문제제기마다 'PC충', '인권충'이라며 딱지를 붙이는 극단적 반PC에도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민, 난민 반대,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미국과 유럽 극우 역시 그 외 다른 대안, 지속 가능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이들 극우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방역을 주도하는 정부와 주류 정당에 맞서 각국의 극우와 대안 우파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인터넷, 소셜 미디어에 숨어 반(反)백신 음모론을 유포하거나, 아무런 대안 없이 마스크 착용 반대 시위를 벌이는 것뿐이었다.
트럼프 현상의 역설
마크 릴라는 트럼프 현상을 보수주의 우파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본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두 공화당 대통령은 공동체 의식, 연대, 공적 의무감 같은 루스벨트 통치 체제의 교리를 수용했다. 레이건과 공화당 우파는 개인의 권리와 선택, 부의 축적, 시장 자유를 내세우며 보수주의 우파의 흐름을 바꿨지만, 적어도 레이건은 웃는 얼굴과 밝은 이미지로 일반 국민들에게 어필했다. 레이건 이후 공화당 우파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량처럼 폭주하고 급진주의적으로 변했다. 우경화된 공화당은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에 대해 한 치의 타협과 양보도 거부했다. 트럼프 현상은 우경화의 막다른 종착점이다. 이제 공화당에는 레이건의 보수주의에 대한 신념, 미국의 미래에 대한 긍정과 확신을 갖는 이들은 찾기 힘들다. 트럼프는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보수주의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럼 진보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크 릴라의 주장처럼 진보주의자들은 시민으로서의 의무감, 연대 의식을 슬로건으로 내세워야 한다. 소수인종과 성 소수자들 역시 자신들만의 커뮤니티에서 벗어나 시민으로서 타 인종,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과 공존하는 경험을 가져야한다. 최근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와 레이샤드 브룩스,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기 난사로 살해된 애틀랜타 한인 여성들을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모두가 함께 추모했다. 그렇게 함께 공감하는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정체성 정치가 역풍을 만나 좌초한 틈을 타 버니 샌더스 등 급진 진보주의자들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연대의 필요성을 이해한다. 급진 진보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것은 인종, 민족, 성별, 성적 지향이 아니라 계급이다. 그러나 마크 릴라는 이 역시 정체성 정치를 대체할 확실한 대안은 아니라고 본다. "오로지 경제적 원한에 기초를 둔다면, 오직 불이익을 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연대감을 공유할 것이며, 경제가 호전되어 그들의 형편이 나아지면 연대감은 곧바로 사라질 것이다"(p.130) 결국 중요한 것은 시민으로서의 의식, 연대, 공적 의무감이다. 트럼프 현상이라는 역풍과 급진 진보주의의 도전을 겪은 정체성 진보주의는 정반합처럼 새로운 차원의 진보주의로 거듭나야 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의 차이보다 공감대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는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공감대와 상식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여성은 성범죄 무고에 대한 처벌, 군인 봉급 인상과 군복무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에는 동의한다. 대다수 남성은 사실 관계가 명확한 성폭력, 조두순, n번방 같은 흉악한 성범죄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며 분노한다. 성 소수자 역시 마찬가지다. 연예인 홍석천과 하리수는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가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남성과 여성, 20대와 586세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 상대를 감정을 느끼고 생각할 줄 아는 '우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2020 미국 대선과 한국
미국 민주당은 마크 릴라의 조언을 나름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조 바이든은 트럼프의 여성 혐오 발언으로 각성한 여성, 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분노를 보인 흑인, 백인 우월주의 선동에 불안을 느낀 아시안,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트럼프 정부에 불만을 가진 노년 백인들을 하나로 규합했다. 더 공평한 분배와 복지를 요구하는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도 고스란히 흡수한 바이든은 광범위한 유권자 연합을 복원해 이길 수 있었다. 중도 성향의 노회한 정치인 바이든은 급진진보주의 경제 어젠다를 꽤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재선에 실패한 단임 대통령, 2번이나 하원에서 탄핵을 당한 대통령으로 남았다. 신좌파의 정체성 진보주의와 공화당 우파의 보수주의 모두에 큰 타격을 입힌 트럼프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진보전성시대의 전주곡을 열지도 모른다고 마크 릴라는 예측한다.
미국 정치를 보고 한국의 진보 정당과 진보 세력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당면한 수많은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첩경은 타인도 나와 같은 사람, '우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낭만적인 제목과 달리 아주 매섭고 쓰디쓴 어조로 진보주의자를 꾸짖는다. 하지만 동료 리버럴들을 향한 저자의 쓴 소리에는 절실함과 애정이 더 돋보인다. 많은 좌절과 선거 패배를 경험해본 진보는 불편하고 불쾌한 목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