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서평(진보너머 독후감 공모전 우수상)
5/24~6/6 동안 진보너머 커리큘럼에 대한 독후감 공모전을 개최했습니다. 본 독후감은 우수상을 받으신 구한솔 님의 글입니다.
내용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필자는 17학번임을 밝힌다.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가 선언된지 2년차이자, 대중화된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된 이듬해에 입학한 것이다. 그즈음 여느 여초학과가 그러했듯, 내가 몸을 담게 된 영화과 역시 시대의 물결을 타고 의식적으로 고무된 ‘영 페미 전사’들로 가득했다.
반면 우연히 캠퍼스에 발을 들이게 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동기들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고,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었으며, 페미니즘 사상에도 무지했다. ‘발화 권력’을 고려해 여성 앞에서 적당히 입 다무는 법도 몰랐고, 생물학적 남성인 주제에 제 할 말 다 하는 것이 ‘맨스플레인’이 된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초학과로 꼽히는 각종 어문 계열과 예체능 계열 중에서도 가장 강성인 ‘영화과’에 들어왔으면서 기본적인 예습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런 나의 존재는 동기들에게 참으로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2년간 여러 충돌을 겪었다. 발표와 토론 수업 당시 내가 “여성으로서 어떤 차별이 있는지 대표적으로 사례를 들어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바로 차별이다.”라는 면박만이 돌아왔고, 그들 딴에 무례한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입 닥쳐라.”는 욕설을 들은 적도 있다. 내가 본보기로 집단린치를 당하는 것을 목격한 몇몇 인원은 반수, 편입, 전과, 자퇴 등의 경로를 통해 공동체를 하나둘 떠나갔고, 우리 학번은 극렬 여성주의자들을 위주로 구심력이 작동해 점차 여성이라는 정체성에만 골몰하는 신앙 공동체처럼 변해갔다.
그들은 토론을 극도로 꺼렸고, 서로의 말을 맞장구치기 바빴다. 또한 <벌새>와 같은 페미니즘 성향 짙은 영화를 보며 집단 자의식을 공유했다. 조금이라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도끼눈을 치켜떴고, 이미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끼리 동질성을 확인하는 데만 골몰했다. 특이했던 점은 몇 안 되는 (생물학적) 남성 친구들조차 자처하여 남성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과대표였던 남자 동기가 SNS에 같은 남성들을 향해 “그 성별”이라는 남성 비하적 표현을 서슴없이 쓸 정도였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를 읽고 나서야 알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행태는 정체성 정치가 오랫동안 지속된 미국에서는 진작부터 있었던 일이었다. 그들의 행태는 전형적인 ‘페이스북 정체성 모형(Facebook model of identity)’의 한 사례라 할 만 했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의 저자 마크 릴라는 각자가 자신의 ‘내면의 난쟁이’, 즉 정체성에만 집중하게 된 원인을 면밀히 분석한다. 그는 어떤 정치사상이 주목을 받는 데에는 반드시 시대의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 취급받는 ‘레이건주의(Reaganism)’ 역시 이러한 물질적 토대 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경제 위기와 양차 대전을 극복한 뒤 ‘시민적 지위’를 공유하는 이들이 한데 뭉쳐 이겨내야 할 거시적 목표를 상실한 듯 보였고, 이로 인해 개인주의 문화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저자는 약자를 돕기 위한 사회보장이나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헌신을 깡그리 무시한 채 오직 개인이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 돌보는 레이건 시대의 개인주의를 이른바 ‘반(反)정치’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한 가지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데, 작금의 정체성 정치 역시 ‘좌파적 버전의 레이건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결과적으로 진보를 분열시켰고, 정체성 정치에 소외된 ‘백인 노동자 계층’을 떠나가게 했다. 그 이전까지의 소수자 혹은 약자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은 엄연히 시민적 지위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지지까지 얻어 실질적 결과를 도출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가 오직 자아라는 동굴 속에 파고들며 침잠하는 형태로 변질되면서, 진보정치는 그들끼리의 운동 혹은 소수 엘리트의 세미나를 통한 일방적 훈도(薰陶)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배타성은 비전을 공유할만한 타인과 손을 잡고, 때로는 타협을 하며 결과를 만들어나가는 현실 정치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보정치는 2016년 포퓰리스트 정치인 트럼프에게 패배하는 대가를 치르고야 말았다.
미국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출간년도인 2018년의 현실과 얼추 들어맞았다면, 한국에서는 2021년 현재의 상황과 꼭 들어맞는다. 다문화-다인종 국가인 미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단일문화-단일인종 국가인 한국은 그동안 정체성 정치가 득세할만한 여지가 적었다, 하지만 2016년 이후 래디컬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한 젠더담론이 수면 위로 올랐고, 그 극단적 흐름에 대한 반발이 2021년 재보궐 선거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72.5%라는 비율로 오세훈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20대 남성의 표심을 2016년 광적인 트럼피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남녀라는 정체성과 정체성이 맞붙어 급기야 사회가 둘로 쪼개졌다는 점에서 트럼프 시대만큼이나 심각한 갈등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엔 사회가 각자도생의 아수라장으로 변할 수 있기에 매우 우려스러운 국면이다. 특히 여성 안전 문제와 같이 남녀가 딱히 갈등을 빚을 만한 요인이 없는 문제마저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극단적인 갈등 프레임에 갇혀 조롱거리로 격하되고 있는 세태가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마크 릴라는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를 통해 현재의 꼬인 실타래를 풀만한 매커니즘을 제공했다. 우선 작금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 물질적 조건, 즉 극도의 개인주의로 사회를 파편화시킨 ‘저성장 구조’라는 현실부터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정체성을 뛰어넘은 ‘시민적 차원의 연대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약 경제 구조의 모순을 직시한다면 사회경제적 약자인 다수 대중을 (젠더를 막론하고) 시민적 차원에서 아우를 수 있을 것이고, 거시적 목표를 향해 힘을 합치는 공동체주의를 비로소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론은 ‘큰 바위 얼굴’이라 할 만한 좌파 이론가와 정치가가 대중을 ‘훈도’가 아닌 ‘설득’하는 형태가 되어야 옳다.
이러한 공동의 노력에 협력하기는커녕 비타협적 분열을 일삼는 이들은 사회악으로 취급받아야 마땅하다. 그간 언론에서는 남초 커뮤니티의 극단적인 의견만 취사선택하여 비판하고, 여초 커뮤니티의 극단적인 언행은 약자의 저항이라는 명분으로 양해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편향은 혜화역 시위 이후 사회적 수인한도를 훌쩍 뛰어넘었다. 위에서 언급한 남자 동기의 경우, 얼마 전 신지예와 이준석이 출연한 100분 토론 라이브에서 일부 남성들의 부적절한 댓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이런 게 바로 남성 권력, 남성 문화, 광기 그 자체”라고 분노했다. 물론 불특정 다수의 인원이 댓글 창에 의견을 달다 보니, 개중 극단적인 댓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남성 권력, 남성 문화”로 일반화시킨 것이 동굴 속 사내의 첫 번째 문제이며, 자신이 실존적 상황에서 정확히 똑같은 부조리 앞에 침묵했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내로남불이 그의 두 번째 문제다. 5년 전 시간강사가 생물학적인 남성이고, (본인들이 ‘여혐 예술가’로 낙인찍은) 나홍진 감독의 영화를 레퍼런스로 보여줬다는 이유로 강사의 과거 실패담까지 들먹이며 단톡방에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바로 그 사내의 동기들이다. 충격을 받은 그 시간강사가 오랫동안 몸담은 캠퍼스를 강의 평점 테러까지 받으며 떠나야 했던 사실을 벌써 잊은 것인가?
‘역지사지’라는 미덕이 사라진 오늘날, 우리 모두는 내면의 거울로 자신의 흉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어쩌면 ‘동굴 속 인간’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필요하다면 내 허물에 대해서도 기꺼이 고해성사를 할 용의가 있다. 그것을 통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어느 유목민족 지도자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길을 내어 나아가는 자만이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