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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Jun 16. 2021

페미니즘 혹은 여성해방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서평(진보너머 독후감 공모전 우수상)

5/24~6/6 동안 진보너머 커리큘럼에 대한 독후감 공모전을 개최했습니다. 본 독후감은 우수상을 받으신 차새(필명)님의 글입니다.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라는 책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은 페미니즘과 여성해방을 대치시킨다. 페미니즘과 여성해방이 대치된다니? 우선 여기부터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사상이 아니었던가?


  저자들은 여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이 동일시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진다. 예컨대 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여성해방운동도 페미니스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저자들이 페미니즘과 대치시키는 것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다.


  이처럼 저자들이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내세우는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의 철폐 없이 여성해방(더 나아가 보편적 인간해방)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서’다. 자본주의가 여성 등 다양한 소수자들을 억압하며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 해방적인 투쟁에 어려움을 겪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명 ‘분리하여 통치하라’이다. 이는 임금 차별을 두어 결과적으로 자본가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한다.


  저자들이 보는 페미니즘이란 물질적 생산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억압의 영역이 있다고 보고, 여성억압을 철폐하는 운동이 계급억압을 철폐하는 운동과 독자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이는 세 가지 점에서 오류인데, 첫째, 자본주의가 폐지되지 않아도 여성억압이 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여성과 남성을 분열하게 만든다, 셋째,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은 다양한 종류가 있고 정의도 저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저자들의 ‘사회주의 여성해방론’도 ‘일종의 페미니즘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단어 자체에 크게 집착하는 것은 지지부진한 논의로 흘러가기 쉽다. 저자들이 ‘우리는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사회주의에 방점을 찍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더해서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페미니즘과 대립하며 여성해방론을 주장했던 역사적 배경을 잇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을 기획하고 실행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페미니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 책은 인류학의 성과에 기대어 여성억압의 기원을 설명한다. 이 성과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이다. 원시시대에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있었고, 계급 출현과 동시에 여성억압이 시작되었다. 이 책은 계급억압이 있고 나서 여성억압이 생긴 게 아니라, 둘이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도 강조한다. 엥겔스의 설명이 계급환원론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는 듯하다.


  오늘날 엥겔스의 설명은 갖가지 유물들과 인류학자들의 주장에 의해 뒷받침되어 인류학의 기본 명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아직도 성차별이 남아있는 것에 대한 힌트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현대사회의 여성억압도 물질적 생산 구조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는다. 여성억압은 지배계급이 이득을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단순히 낡은 인식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물질적 생산 구조에서 근본 원인을 찾기 전에, 먼저 저자들은 무급 가사노동이 자본가들에게 이득을 준다는 통상적인 설명을 거부한다. 무급 가사노동이란 주부들이 임금을 받지 않고 가사노동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무급 가사노동은 언뜻 보기에 ‘공짜’이기 때문에 싼값에 노동력을 재생산하게 해주고 따라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한테 주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임금)을 아낄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착각이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간단하게 시장에서 가사노동 서비스를 구입하는 것이 가정주부인 아내가 가사를 전담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적게 들 수 있기 때문에 아내가 가정주부로 일하는 게 늘 자본가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하지만,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우선 앞에서 말했듯이 무급 가사노동이 공짜라는 인식은 착각이다. 무급 가사노동을 하는데도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노동력에도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주부의 생활비는 누가 벌어오는가? 우리는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다. 바로 남편이 벌어온다. 그리고 그 남편이 벌어오는 월급은 자본가가 지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급 가사노동은 공짜가 아니다.


  만약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어 있다면 그 비용은 십중팔구 지금보다 더 낮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업과 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전업주부가 있어서 자본주의가 경제적 이득을 볼 이유는 없다. 오히려 여성의 노동력을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윤을 더 얻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을 종속하는 가정이 유지되는 걸까? 저자들은 여성이 임신ㆍ출산을 한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로 인해 여성들이 ‘열등한 노동력’으로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자본주의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는 측면을 과소평가하는 면이 있다. 또한 임신ㆍ출산으로 인해 열등한 노동력으로 고착화된다는 것은 여성억압을 일정 정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왜 가족 제도가 존재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개별 가정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것보다,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어 있는 게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노동자들 또한 가족의 해체에 맞서 싸웠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정은 경쟁지상주의의 사회 공간에서 어느 정도 분리되어 정서적 안정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정서적 기능을 가진다. 이와 관련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핵가족 제도가 형성 및 유지되는 것을 원했다는 역사적 진행 과정이 있다. 이는 린지 저먼의 《여성과 마르크스주의》라는 책에서 잘 설명되어있는데,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의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저자들과 다른 필자의 주장은 이 정도로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는 자본주의가 막대한 생산력으로 여성억압 및 보편적 인간해방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쌓았다는 점도 지적한다. 과거 노예제 사회에서는 생산력이 너무 낮아 일부의 사람들만이 해방될 수 있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철폐가 곧바로 여성해방을 이끌어낼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는 여성해방의 최대 걸림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소위 부르주아 페미니즘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 ‘상층부’에 여성이 많이 진출하는 것을 여성해방의 척도로 보는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이 책은 여러 페미니즘 개념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우선 ‘가부장제’라는 개념이다. 가부장제는 페미니스트들이 흔히 쓰는 말이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원래 가부장제란 ‘가부장 중심의 생산양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가부장이 생사여탈권을 쥘 정도로 가족 구성원들을 노예처럼 부리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이와 다르다. 일단 기본적으로 가내에서 생산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가부장제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개념이란 변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정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의고, 막스 베버라는 학자가 가부장제를 전통적ㆍ카리스마적 지배구조의 일종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베버의 정의는 궁금한 사람이 공부할 수 있도록 언급만 해두고, 여기서 핵심적으로 중요하진 않으니 넘어가자.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가부장제란 단어를 빌려와 원래의 의미에서 멀어진 형태, 즉 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폭넓고 희미한 방식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성차별적 문화 혹은 여성억압적 구조 일반을 가리키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의미가 너무 물탄 것처럼 흐릿해지다 보면 왜 굳이 가부장제란 말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저자들의 지적에 의하면 가부장제 개념이 초역사적으로 작동하는 구조처럼 생각되다보니 반작용이 더 심해지는 것이다. 가부장제 개념이 없으면 여성억압의 원인을 잘 설명할 수 없고, 해결책도 찾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가부장제란 단어를 부정하면 반발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가부장적 문화’ 정도로 표현하면 의사소통에 있어 불필요한 충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들은 ‘정체성 정치’도 비판한다. 예컨대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진 대표가 소수자의 삶을 개선하는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꼬집는다. 버락 오바마는 긴축 재정을 실시해 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그 돈으로 구제금융 자금을 마련해 금융 자본가들을 구출해주었는데, 이는 열악한 다수 흑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정책이었다. 힐러리 클린턴 또한 월마트 사외이사일 때 여성 노동자들을 탄압했고, 영부인 시절 가난한 부모에게 주어지는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등 빈곤층 여성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펼쳤다.


  저자들은 정체성 정치가 온건한 체제 순응적 운동이 되었으며, 계급문제를 은폐한다고도 지적한다. 계급적 분석을 결여하는 정체성 정치는 백인 노동자계급을 배제한다. 또한 자본주의가 차별을 이용하는 문제와 일상적 차별의 경험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갖은 소수자들이 겪는 억압에서 구조적 맥락을 지운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정체성 정치와 연관된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도 비판하는데, 이를 다양한 억압들을 기계적으로 병렬하는 다원론이라고 본다. 상호교차성은 중심이 없고, 중심을 말하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주요 타격 방향을 어떻게 잡고 투쟁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없다. 여러 억압이 골고루 중요하다는 명분으로 그 억압들을 기계적으로 결합한다면, 그 개념은 어떤 억압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부적절한 실천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는 기존의 페미니즘 내에서 유명한 책들과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러나 이 책이 안티페미니즘의 입장에 서있는 것은 아니다. 진보주의지만 페미니즘도 안티페미니즘도 아닌 입장에서 성차별 문제를 검토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차별 문제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기존의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거나,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살펴보아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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