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지만, 돈에 대한 개념도 달랐다. 사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해서 내가 결혼을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귄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양재역 맥도날드에 앉아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뜬금없이 나에게 저축을 얼마나 하냐고 물었다. 앗, 이렇게 깜빡이도 없이 들어오다니!
보통 결혼 준비를 하며 서로의 재정상태를 오픈한다는데, 사귄지 한 달만에 재정 오픈이라니.
나는 솔직하게 그동안 모은 돈은 거의 없고 직장을 옮긴 얼마 전부터 한 달에 얼마씩을 저축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남편은 나에게 월급과 고정으로 나가는 지출을 쭉 적어보라고 했다.
순순히 하라는 대로 적어보니 쓸 수 있는 돈이 많지 않았다. 한 달 생활비로 쓰다 보면 저축할 돈이 많지 않다고 했더니 남편은 나에게 일침을 날렸다. "쓰고 나서 저축하는 게 아니라 우선 저축하고 남은 돈을 쓰는 거야."
아, 왜 그런 생각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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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봉임에도 내가 사고 싶은 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려서 지르고 나야 속이 편했다. 그래서 없는 형편에 카메라도 사고 여행도 종종 다녔다. 직장을 옮길 때 잠깐 쉬었는데 모은 돈에서 생활비가 나가다 보니 그때 빚을 좀 지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돈이 항상 모자를까 싶어 내 월급과 고정지출을 한번 적어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글쎄 생활비가 마이너스가 아닌가???
쥐꼬리만한 월급에 월세와 보험료, 카드값 등을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였다. 그때 좋아하던 일을 하고 있었는데 30대 초반에 열정만으로 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직을 준비했다. 작은 눈덩이를 굴리면 금새 큰 눈이 되는 것처럼, 작은 카드 빚이 얼마나 크게 부풀려지는지 그때 경험하고 신용카드를 잘라 버렸다. 내 스스로 소비를 통제하기 어려우니 카드를 없애는 방법으로 막아버린 것이다.
그러다 전자매장에서 노트북을 사면서 포인트 카드를 만들면 할인해준다고 해서 하나 만들었다. 지금도 신용카드를 쓰긴 하지만 한도를 정해놓고 가능하면 체크카드를 쓴다. 당시는 나의 흑역사이기도 하지만 돈 관리를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처절히 깨달은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때쯤 '누군가 내 돈 관리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없는데 관리할 줄을 몰라서였다. 그때 남편이 나타났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짠돌이 of 짠돌이.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미리 할인된 금액으로 상품권을 사서 장을 보고, 사고 싶은 건 6개월 동안 돈을 모아서 쇼핑몰에서 파격 세일을 할 때 산다. 나는 주로 향수나 만년필 등을 선물했다면 남편은 청소 막대 걸레를 사주는 등 필요한 걸 선물했다.
남편은 나에게 통장에 차곡차곡 돈이 쌓이는 재미를 느껴보라고 했다. 돈은 통장을 스치는 용도인 줄만 알았지 돈이 쌓이는 재미라니. 들을수록 신선했다. 남편도 월급이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월급의 상당 부분을 저축하고 있었다. 월세가 안 나가니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들어보니 그냥 안 쓰고 산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나는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집 앞 시장에서 재료를 사서 집에서 만들어 먹고, 옷은 뭐 고등학교 때부터 입은 걸 10년 넘게 입고 있었다. 가끔 중고매장에서 만 원짜리 멋진 자켓을 샀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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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남편은 나의 재정 상태를 보더니 일단 여기서 얼마를 저축한 후 나머지를 쓰고 CMA 카드를 만들라고 했다. 이건 그날 그날 이자가 붙는 건데 위험성은 있지만 이율이 높은 편이라고 했다. 다음 날 당장 이 카드를 만들었지만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결국 한 번도 못 썼다.
결혼하니 혼자살 때보다 돈이 덜 들기도 하고(무엇보다 월세가 안 드니 좋다) 데이트 비용도 아낄 수 있으니 그때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돈 관리를 잘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통장 잔고가 얼마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돈 관리를 못할 때는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도 몰랐다. 자꾸 앵꼬가 나서 왜 그럴까 정신이 들어 보니 카드 빚만... 나는 MBTI 검사를 하면 주요 특징에 '가계부를 소설로 쓴다'고 되어 있다. 그걸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공감해서)
그때 맥도날드에서 이 사람이 결혼할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물론 처음 만날 때부터 좋은 느낌이었고 막연히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이때 확신이 생겼다. 그렇게 우리는 1년이 더 지난 후에 결혼했다.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더니 나도 남편을 닮아 아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살짝 스트레스기도 했는데, 자꾸 하다 보니 좋은 걸 싸게 사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남편이 연애할 때 자기가 어떤 제품을 얼마나 싸게 샀는지를 자랑하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지금은 이해가 된다. 나는 뭔가를 살 때 비싸면 비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적정한 수준에서 비싼 걸 골랐다. 비교하고 알아보기보다 일단 마음에 꽂히면 그걸로 샀다. 근데 지금은 최저가로 검색한 후 가장 저렴한 것 중에서도 후기가 좋은 걸 고른다. 좀 비싼 제품도 이월상품으로 사면 더 싸게 살 수 있다.가끔 실패할 때도 있지만 계속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긴다. 그래도 해외직구에 이벤트에 적립금까지 챙기는 남편을 따라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