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가능한 시험지
서울로 전원을 하기 전에 강릉아산병원에 필요한 자료들을 받으러 갔다. 진단서를 받았는데, 영문으로 T세포 또는 호지킨 림프종이라고 적혀 있었다. 림프종은 크게 호지킨림프종과 비호지킨림프종으로 나뉘는데, 호지킨 림프종은 평균 생존율이 80% 이상일 정도로 예후가 좋다. 상대적으로 예후가 덜 좋은 비호지킨림프종은 다시 B세포, T세포 등으로 나뉘는데 B세포가 전체 림프종의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발병율이 높고, T세포는 드물기도 하고 예후가 좋지 않다는 글들을 많이 봤다. 진단서에 적힌 T세포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자세히 읽어보려는데, 종이를 마주 잡은 남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호지킨일 수도 있는데, T세포가 먼저 적혀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왠지 확률이 높은 걸 앞에 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호지킨 림프종이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자꾸만 불안한 생각쪽으로 기울었지만 애써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마침 코로나로 어린이집이 휴원하면서 친정에 머물렀다. 일주일 정도 있으려고 했지만 여름방학까지 겹치면서 3주 가까이를 지냈다. 낮에는 두 아이를 따라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가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소리 없이 베갯잇을 적시며 꺼이꺼이 울었다. 같은 시각 집에 홀로 있는 남편도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며 매일 울었다고 했다.
1%의 희망
암 진단을 받은 후 남편은 눈물이 많아졌다. 만난 이후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남편은 자신이 아파서 아이들 바다에 못 데려간다고 울고, 나한테 너무 고생한다고 울고. 당신만 건강하면 다 괜찮다고, 좋아질 거라고, 조금만 힘내자고 남편을 위로했다. 그동안 남편이 나와 가정을 위해 많이 고생했으니, 이제 내가 고생을 해서 우리 가족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문득 남편과 처음 소개팅을 하던 날이 떠올랐다. 댄디한 옷차림에 중저음의 목소리에 나는 남편에 한눈에 반했다. 그날 이 남자와 사귀고 결혼하고, 강릉으로 이사하고, 그리고 암에 걸릴 줄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의 만남이, 삶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면서 서럽고 아프게 울었다.
앞으로의 인생은 더 이상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진료한 의사도 T세포일 가능성이 큰 것 같다며 “40% 안에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40%라니. 살 수 있는 확률이 반도 안 된다니. 하나님이 정말 남편을 데려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해두니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졌다.
40%에 절망하고 있을 때, 매일 들어가던 림프종 카페에는 1%의 희망이라도 있으면 뭐든 해보겠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1%에도 희망을 거는데, 40%에 희망을 못 걸 이유가 있을까.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카페구성원은 대부분 본인 또는 가족이 림프종으로 투병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관련 정보도 많이 얻었지만, 서로 위로하고 응원하며 희망찬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에서 용기를 많이 얻었다. 그래, 우리도 이겨낼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생겼다.
9회말 역전승
패배가 짙은 상황에서 이루어내는 역전은 더 짜릿하고 감격적이다. 삼성서울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다시 했는데, T세포가 아닌 호지킨 림프종이 나왔다. 평균 생존율이 80%였다. 남편은 3기이고, b증상이라고 하는 체중 감소가 있어서 확률이 조금 떨어지긴 하겠지만 희망적이었다. 남편이 먼저 진료를 가고, 서울로 가는 KTX 안에 있던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해줬는데, 그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 같아 감사했다.
세부 아형이 바뀌어서 치료 약도 바뀌었다. 3주에 1번씩 6회 예정이었던 치료가 2주에 한번씩 12회로 바뀌었다. 약은 ABVD 네 가지 약을 썼다. 남편은 항암약을 주사하기 위해 팔에 관을 삽입하는 PICC 시술을 했다. 물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씻을 때는 방수커버를 씌우고 씻어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 병원에서 소독을 하지만 혹시라도 물이 들어가거나 진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소독하는 법을 배웠다.
항암 약을 맞는 동안 옆에 있었는데 내가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처방받은 약을 사러 다녀오고 음료수와 빵을 사주는 정도였다. 남편은 땀을 많이 흘렸는데 내가 종이로 열심히 부채질을 해주고 있으니까 앞에 계시던 분이 부채를 전달해주시기도 했다.
치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시동생이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먼저 강릉으로 내려오고, 남편은 동생 차를 타고 시댁으로 갔다. 집에 와서 도련님과 통화하니 남편은 저녁을 맛있게 먹고 금방 잠이 들었다고 했다. 하루가 길고 피곤했을 거였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항암 치료 후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언제나 속단은 금물이다. 앞으로 긴 여정이 우리에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