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기대하는 이유
예전만큼 해가 바뀌는 것에 감흥하지 않는다. 올해는 새로운 일들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이 평범한 일상 속에 묻혀 쉽게 꼬리를 감출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는 것에 이토록 무심해져있던 내가 그래도 올해를 조금 기대하는 건, 남편의 항암 치료가 연초에 끝났기 때문이다. 지난 7월부터 시작한 12번의 항암 치료가 해가 바뀌고 1월 초에 끝이 났다. 마지막 PET CT 촬영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왠지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든다. 이제 더는 혼자서 두 아이를 보느라 고군분투하고 한숨 짓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니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희망.
며칠 전 거실 소파에 남편과 같이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걸 보고 있는데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너무나 평범한 보통의 일상인데, 지난 여름 이후 우리 가정은 이 보통의 일상이 무너졌다. 남편은 2주에 한 번씩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항암 치료를 하고 집에 오면 첫 일주일은 거의 누워서 지냈다. 열흘 정도가 지나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다음 항암치료를 받으러 가야 했다. 남편이 힘든 걸 알지만, 나도 당장 두 아이를 보느라 힘이 드니 남편의 힘든 게 잘 보이지 않았다. 항암 부작용을 토로하면 남편을 위로하고 토닥여줄 여력이 없었다. 나도 어디 가서 힘들다고 토로하고만 싶었다.
새로운 변화
지난해 가을 1층으로 이사를 했다. 예전 살던 2층은 거실이 좁아서 주로 침대방이나 안방에서 놀았는데, 넓은 놀이 공간이 생기니 아이들은 거실에서 스스로 놀잇감을 찾아서 놀기 시작했다. 둘째가 걷기 시작하고 자라면서 언니랑 함께 놀기 시작하니 예전보다 손이 덜 가고 한결 수월해졌다. 주거 환경의 변화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언젠가 이사를 하려고는 했지만, 남편의 암 진단 후 그 시기가 빨라졌다. 때론 인생의 장애물이 평소 가던 길이 아닌, 안 가본 길, 새로운 길을 가보게 하는 계기를 만든다.
아이들이 자라고, 이사를 하고, 해가 바뀌면서 모든 것들이 더 나아졌다. 다행히 남편의 치료 경과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곪은 상처들도 조금씩 덜 아프게 만들어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텼는지 코 끝이 찡해지는 눈물만이 그 시간들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행복과 불행은 한끗 차이
남편이 바빠서 아이를 혼자 보는 엄마들도 많을 텐데, 나는 남편이 바쁜 거랑 아파서 못 돌봐주는 건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아리고 속상해졌다. 틈만 나면 쉬기 보다 일하기를 좋아하던 남편이 힘없이 늘어져서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마음이 힘들었다. 그러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다행인 것들도 많은데 부정적인 것만 바라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꾸면 금세 괜찮아졌다.
남편은 암에 걸렸지만 그 덕분에 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당연히 누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일상이, 행복이, 평화가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살아 있음이, 평범하게 오늘 하루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한 날들. 행복과 불행은 마음 먹기에 따라 한끗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내 마음은, 아마도 남편의 마음도, 예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단단하게 굳은 살처럼 무뎌지고 굳어진 마음들이 많았는데, 그 마음들이 말랑해지고 봄꽃처럼 새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