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감독의 단편영화 제작기
프랑수아 튀르포는 195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영화 운동 ‘누벨바그’의 핵심 인물로 꼽힌다. 그가 언급한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은 한국 대중매체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단계는 두 번 영화를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씨네필 3법칙’이라고도 명명되는 이 말은 실제로 튀르포가 적은 것에 해석이 더해져 왜곡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씨네필 3법칙은 영화라는 매체를 더욱더 풍성하게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만 있다면 비교적 쉽게 향유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인 영화를 만듦으로써 사랑하는 방법은 그리 쉽지 않다. 영화 제작은 기본적으로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고 장비와 스텝들을 모아야 하며 가장 중요한 건 돈이 있어야 한다. 나는 언젠가 꼭 영화를 만들어 보리라는 야심 찬 소망을 간직한 채 영화 공부를 해왔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영화인들을 양성하기 위한 영화학교가 해마다 진행되고 있다. 때마침 모집 공고를 보게 됐고 여건이 잘 맞아 수강하게 되었다. 2명의 영화감독님이 한 팀씩 맡았으며 내가 있던 팀은 7명의 학생이 수강했다.
수업 시간에는 영화의 특정 장면들을 보며 감독이 이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으며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를 배웠다. 모든 장면들은 그렇게 찍어야만 하는 의도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틀에 박힌 연출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매 수업 숙제로 다음 수업 때 자료로 쓰일 영화 두 편을 감상해야 하며 실제 팀에서 제작하게 될 각자만의 시나리오를 써가야 했다. 단연 “영화”로워지는 나날들이었다.
처음 썼던 이야기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핸드폰에 알림이 뜬 실종자를 직접 찾아 나서는 내용이었다. 한창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에 빠져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나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지도 감독님은 내 시놉시스를 보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어른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진정으로 아이의 시선이 담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쓴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 한 학생이 우연히 겪게 된 첫 상실을 담은 이야기였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던 여행에서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사고로 죽게 되고 그 이후에 남겨진 남자 아이의 상실감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겪은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시나리오 주인공과 같은 상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지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내기 어려웠다. 감독님은 작위적이라는 피드백을 여러 차례 주셨으며 “진짜 상실”을 표현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자료조사나 인터뷰를 통해 상실을 알아가야 보다 담백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만큼 시나리오에 시간 투자를 하지 않았었다. 결국 이 시나리오는 제작 작품으로 선정되지 않았다. 노력과 열정을 덜 들인 만큼 스스로도 시나리오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과연 이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인가?’하고 자문했다.
제작 작품으로 뽑힌 시나리오는 20대 굴삭기 기사가 소음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그리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수정해나가는 과정에서 소음성 난청으로 권고사직을 받은 60대 굴삭기 기사에 대한 이야기로 발전되었다. 본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연출까지 맡아야 했지만 해당 팀원이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 후반작업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무도 연출을 한다고 선뜻 나서지 않았고 결국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연출을 내가 한다고 손들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촬영을 준비하는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으로 연출이 해야 할 일은 끊이지 않았다. 배우 모집 공고를 올리고 인터뷰해 선정하는 과정부터 로케이션 헌팅, 시나리오 수정, 스토리보드 작성 등 결정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자면 당면한 일들을 해나가는데 급급해 디테일과 연출적인 고민을 놓쳐버린 거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 달간의 프리 프로덕션 과정이 있었던 만큼 촬영 날들은 긴장되긴 했지만 설레는 감정이 더 컸다. 처음 맡는 연출이다 보니 지금 찍는 장면들이 잘 연결되어 표현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지만 감사하게도 경험이 있는 스태프 분들 덕분에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영화란 어떻게 보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배우부터 스태프까지 모두가 열심히 준비하고 몰입해 촬영한다는 것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마치 모두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거 같다”라든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조금 과해 보일 거 같다” 등 현장에서 함께 숙의하며 더 나은 장면들을 만들려고 한 과정들은 연출자가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후반작업을 하면서 전체적인 영화의 그림이 그려졌을 때쯤, 만족보단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다. 샷의 구도나 세세한 디테일들에서 부족함이 보였다. 시간 안에 촬영하는 것에 치중했던 탓에 놓쳐버린 것들이었다. 재촬영을 하지 않는 한 다시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기에 프리 프로덕션만큼이나 촬영에서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깐깐해야 한다.
촬영 때를 생각해 보면 그저 괜찮게 찍히면 “오케이”를 외쳤다. 같은 장면을 찍는 횟수가 길어질수록 스텝들과 배우들의 눈치를 봤던 탓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아쉬우면 설령 욕을 먹더라도 다시 찍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에서 힘들었던 것들은 녹아내린다.
우연한 기회로 대학생 때 첫 영화를 찍고 영화제를 다녀왔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마지막’이라는 말을 되뇌었지만 영화제를 다녀오고 사람들에게 만든 영화를 보여주면서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가 되면 제작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볼 생각이다. 한 번쯤 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만드는 것도 의미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과연 내가 창작을 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해답이 도출되지 않는 난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영화를 세 단계로 사랑했고 어느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영화를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