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번역'으로 가는 길에 대한 고민.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문학동네
2018년 06월
최근 <블루버드, 블루버드>(애티카 로크)를 읽고 번역이라는 과정에 대한 의문이 들며 고른 책. 무엇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 <더 로드>(코맥 매카시)의 번역가인 정영목 선생의 저서다. 번역에 관한 가벼운 에세이로 알았으나, 번역을 둘러싼 화두를 조금 깊게 다룬다.
번역 실무(는 많이 다루지 않았지만)에서 번역학, 번역과 결부된 언어학적의 영역까지 넓고 깊게 나아간다. 그 너른 주제를 오가며 저자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요구하는 건, 번역에 대한 적극적 비평과 방향성에 대한 논의다. 번역은 사실상 원작에 비해 부차적인 영역으로 다뤄지다 보니 번역의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번역가들이 언어적 과제를 가지고 번역에 임하며 장기적으로 번역의 질도 향상될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여러 영역에 걸쳐 그가 제시하는 화두를 압축해 단순화하자면, 바로 '좋은 번역'에 대한 통념을 파고들어 해체하는 일이다. 그는 "이 책은 번역한 것 같지 않아" "번역 같지 않은 번역이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세간의 통념을 번역이 그대로 따라야 하는가, 그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반복적으로 탐구한다. 원문을 '오롯이' 옮기는 일과 '매끄럽게' 전하는 일 사이의 무게중심을 고민한 흔적이 드러났다.
짧은 내 생각으로는, 단어와 문장이라는 건 계량적이지 않기 때문에 번역이라는 건 어떤 애를 써도 결국 너무나 주관적이고 절대 중립적일 수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번역가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좋은 번역'이라는 건 결국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문제, 답이 없는 문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저자가 시도하는 논의가 모두 무용하다는 건 아니다. '좋은 번역'의 절대적 기준은 없을지라도,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슬쩍 기울어지는 길은 있을 테니까. 책을 읽으며 아주 많은 경우 번역에 기대는 독자로서, 그 길을 찾아가는 저자의 고민을 성원한다.
번역은 독해보다 천만 배 무겁다. 외국어로 의미를 어림잡는 행위와 그것을 모국어 문장으로 확정하는 결단 사이에는 통과해야 할 엄격한 법정이 존재한다.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는 훌륭하게 정리했다. “번역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독서라면 그 삶을 흡수하여 소화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번역이라는 것은 그 삶을 밖으로 잡아 끌어내 세포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몸뚱이가 솟아오를 때까지 자기가 꽉 붙들고 있는 것이다.”(쓰지 유미, 『번역사 산책』, 이희재 옮김, 궁리, 2001)
(14-15쪽, <"세상 모든 일이 번역인지도 모르죠" -『씨네21』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번역사 산책』을 몇 장 넘기다보면 금세 어수선한 마음이 가라앉는데, 특히 앞부분에 서술해놓은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번역사에서는 극적인 재미까지 맛볼 수 있다. 저자는 헬레니즘으로 정리된 서구문화가 역사의 격변을 따라 '놀랍게도' 아랍으로 번역되었다가 다시 유럽으로 재번역되고, 그것이 다시 라틴어에서 각 나라말로 번역되는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데, 이 과정을 음미하다보면 번역이 과연 저자의 표현대로 “보편적 행위”인 동시에 역자의 표현대로 "보편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행위"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여기에 약간의 상상을 보태 이 번역사가 곧 계몽주의 이후 서구 곳곳에서 전복을 시도해온 '진리' 또는 '진리의 권위'를 수립하고 계승해온 과정이라고 보게 되면, 번역이 역시 반역 못지 않게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56쪽, <번역사 산책> 중에서)
창조적 개입 없이 단지 복제나 재현만 하는 번역 또는 다른 어떤 글쓰기는 생각할 수 없다. (……)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를 단순히 (……) 중립적으로만 전해줄 수는 없다. 여기에는 늘 해석의 요소가 관련되기 때문이다. (……) 모든 번역, 특히 문학 번역은 번역가의 창조성을 포함한다. 해석 자체가 창조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진 보즈 바이어, 『문학의 번역』)
이 인용에서는 몇 가지 점이 주목할 만하다. 첫째, 번역에서 완전히 중립적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둘째, 이것이 발생하는 원인이 번역 자체에서 온다기보다는 해석 행위에서 온다는 점이다. 셋째, 읽기 자체가 해석 행위라는 점이다. 즉 텍스트를 중립적으로 읽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읽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맥락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훨씬 더 낮음에 있습니다. 인식의 해상도는 우주의 해상도보다 훨씬 낮겠지요. 이렇다 보니 수학적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Many to one mapping이란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과 언어를 봤을 때 상당히 다양한 생각들이 동일한 단어로 매핑될 수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생각의 수가 언어의 수보다 훨씬 많으니까요. 일대일 매칭이 안 되는 거죠. 따라서 단어만 보고 역으로 '어떤 생각을 했었는가?'라는 재구현 역시 불가능합니다.(김대식, 『인간 vs 기계』)
과학적으로 표현되었지만, 해석의 불가피성을 보여주는 좋은 설명인 듯하다. 나도 다른 자리에서, 인간의 언어는 성기기 때문에 번역의 반은 상상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인간은 글을 읽을 때 자신의 맥락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상대의 맥락을 재구축하며 읽어나가고 이것이 다양한 독해를 만들어 낸다. 이 때문에 같은 텍스트의 번역이라도 다양하게 표현된다. 하나의 악보에서 다양한 해석의 연주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음악 연주를 창조적 행위라고 본다면, 이런 읽기를 창조적 행위라고 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94 -96쪽, <읽기로서의 번역> 중에서)
(전략) 실제로 번역을 하는 것이 저자와 나 사이에서 어떤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기질적으로, 내 언어로 저자를 굴복시킨다는 생각을 잘 못한다. 사실 그런 능력도 없다. 그렇다고 반대로 저자에게 굴복당할 생각도 전혀 없다. 차라리 안 하면 안 했지, 그런 식의 일방적 통일은 별로 원치 않는다. 무조건적 합일이 아니라 둘 사이에는 흔히 말하듯이, 별과 별 사이처럼 서로 너무 멀어져서 헤어지지도 않고 너무 가까워져서 합쳐지지도 않는 어떤 이상적인 거리, 그런 팽팽한 긴장과 균형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분들의 좋은번역에서도 그런 긴장과 균형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그 긴장된 거리를 어떻게든 확보해보려고 텍스트를 헤집고 다니는 것이다. 그 결과로 탄생한 번역의 언어는 이상적일 경우, '너'의 글쓰기도 아니고 '나'의 글쓰기도 아닌, 저자의 언어도 아니고 내 언어도 아닌, 또 어떤 면에서는 외국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그 긴장 관계 속에서 잉태된 제3의 언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20-121쪽, <번역가의 글쓰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