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김초엽」
다섯 살인 딸아이가 물감을 쓸 땐 붓으로 꼭 여러 가지 색을 섞곤 한다. 물감이 뭉쳐서 새로운 색깔로 변신하는 것이 아주 신기한 모양이다. 어떤 날은 진흙탕 같은 색이 되어 그림을 아예 망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원래 물감에 없던 영롱한 색이 탄생해서 스케치북에 멋진 봄이 찾아오기도 한다.
아이의 미술활동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쩌면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일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록 도화지를 망칠 가능성이 있더라도 물감을 이리저리 섞어보는 것처럼, 인생에도 번뇌와 갈등이 반복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선택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결혼이나 출산, 취직처럼 일상적인 것이기도 하고, 혹은 정의를 위해 용기를 낸다거나 어떤 새로운 무리의 일원이 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 새로운 길은 참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한다.
정해진 12가지의 물감을 그대로 사용하면 예측 가능한 아름다움은 창조해 낼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대신 물감을 섞는 시도에는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이 뒤따른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날 수도 있고, 혹은 아예 뒤죽박죽 망쳐버려서 물감도 스케치북도 다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소개할 소설은 김초엽 작가의 단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 같기도 한 이 소설은, ‘마을’과 지구’라는 두 대비되는 장소와 사람들을 통해 이상과 현실, 완벽과 결함, 인간의 한계, 그리고 사랑이라는 여러 가지 철학적 질문들을 이끌어낸다. 흰 도화지 같은 순백의 ‘마을’에서 태어나 차별도 슬픔도 없이 평온하게 지내는 아이들에게는 성년이 되면 이동선을 타고 ‘지구’로 순례의 길을 떠나는 관습이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지구는 굉장한 차별과 슬픔, 고통이 존재하는 곳이었으나 절반이 넘는 순례자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않기로 결정한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땠을까?
우리는 청정무구한 곳에서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고 그야말로 하얀 물감으로 평생을 살 수도 있고, 세상으로 나아가 여러 사람, 여러 사건과 부딪히며 어두운 색 물감도 뒤집어썼다가 밝은 색 물감도 뒤집어썼다가 파란만장한 모험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때로는 편하고 안정적이며 육아휴직도 다 채워 쉴 수 있는 직장과, 고연봉에 진취적이고 매력적이지만 만년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직장 중에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다. 착하고 바른 친구들과만 어울리고 일탈을 차단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도 있는 반면, 여러 환경의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때론 일탈과 상처를 경험해 보아야 점점 자신만의 색깔을 찾고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믿는 부모도 있다. 부모들은 각자의 믿음에 맞추어 아이의 환경을 조성해주려고 애를 쓴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하면 이사를 가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 속 순례자들은 왜 마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방인으로 여겨지고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한 세계 속에서도 그 불편을 감수하고 기꺼이 살기를 선택한 것은, 그곳이 모든 불편을 감내할 만큼 매력적이었거나 가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과 상처가 난무하고 슬픔을 경험할 수 있는 그곳에서 비로소 ‘사랑’이라는 감정도 처음 느낄 수 있었고, ‘마을’로 돌아와 평온한 생활에 안주하기보다 어두운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하겠다는 결심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검은 물감을 뒤집어쓰기를 선택한 그들은 기꺼이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위해 수고와 번뇌를 감내한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때, 언제나 두렵고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세상에는 언제나 ‘가치 있는 것’과 ‘불편’ 이 공존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인간은 언제나 안정과 위험, 그리고 예측 가능한 것과 예측 불가능한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하고 통제한다 할지라도 완벽은 결코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유전자 배양을 통해 완벽한 후손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릴리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그리고 순례자들은 마을 대신 지구에 남은 순례자들이 되어봄으로써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기술이 아니라 사랑이자 용기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완벽이 아니라 최선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넌지시 일깨운다.
작가는 평온하고 무탈한 현재를 벗어날 때 느끼는 우리 모든 인간의 두려움을 공감해주고 다독여 주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의학과 기술의 발달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가치관에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경고장을 날린 것으로도 보였다. 그녀는 어둠과 고통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비로소 사랑은 더 빛나고 가치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건넨다. 보통 김초엽 작가의 단편들 중에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나 ‘관내분실’을 많이들 좋아하는데 반해, 나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가장 손꼽는 것도 바로 이 깊이 있는 주제들 때문이다.
혹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많은 걱정에 잠겨 있거나, 길을 떠나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짧은 소설이 작은 용기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내가 왜 순례를 떠나겠다고 결심했는지 내가 붙잡고 싶었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당신에게 김초엽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추천하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례자들은 알게 되겠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김초엽(36쪽)」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김초엽(37쪽)」